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 박해의 영성

김레지나 2010. 7. 29. 19:15

차동엽 신부님의 책 <행복선언> 중에서 p.198

 

 

박해의 영성

 

이제 '박해의 영성'을 요약해 보자.

 

 박해의 영성은 사랑의 발로이며 사랑의 완성이다. 부제 스테파노도 사도 바오로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얻었다.

 무엇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박해'를 받기 위해서는 그것과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결국, 의로움 때문에 박해르 받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종의 영성이 아니라 친구의 영성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친구의 영성에서 완전한 사랑이 구현된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그 다음에 더 놓은 수준의 영성이 있다. 바로 연인의 영성이다. 연인의 영성은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친구의 영성처럼 의논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소화 데레사 성녀가 주님께 이런 말을 자주했다.

 "나는 당신의 애인."

 "나는 어떤 여인이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예수님을 사랑하리라"

 이는 관상의 최고 경지다.

 

 사랑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헌신케 한다. 그래서 사명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투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투신할 수 있을까?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 헌신에로 우리를 초대한다.

 "오늘날 예수님의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적다. 예수님께 위로를 청하는 사람은 많지만, 고통을 청하는 사람은 적다.

 예수님의 식탁에 와서 앉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과 같이 단식을 하려는 자는 적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고통을 당하려는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들이 빵이 다 떨어질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지만, 예수님이 가진 고난의 잔을 마시려는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은 존경하지만,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따르려는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들이 역경이 닥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동안은 예수님을 찬양하고 축복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모습을 감추거나 떠나시면, 그들은 불평하고 크게 낙담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고통과 불행이 와도 큰 위로를 받는 순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찬양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위로 없이도 하느님을 똑같이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어떠한 이기심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그런 사랑이야말로 참으로 강하도다. 언제나 위로만을 구하는 사람들은 장사꾼보다 나을 게 전혀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위안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문장 한 문장이 게으른 신앙인의 폐부를 찌르는 간곡한 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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