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 신부님의 책 행복선언 중에서 p.187
십자가 역설
이윽고 교회의 시대에 이르러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으로 선포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3-24)
여기서 박해받음의 상징인 십자가에 초점을 맞춰보자. 사람들이 십자가를 놓고 여러 각도에서 평가를 한다.
유다인들은 본디 '기적'을 즐겨 찾았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입만 열면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다면 기적은 무엇인가? 힘 곧 능력이다. 유다인들은 항상 권능을 추구했다. 이런 눈으로 십자가를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으로 보였을까? "왜 힘없이 맥없이 저렇게 당하지? 아주 약자였구만. 예수님이 강자인 줄 알았는데 약자였구만. 결국, 돌팔이 메시아였구만!" 이렇게 생각되었을 것임이 뻔하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예수님이 메시아로 인정받는데 '걸림돌'로 보였던 것이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원래 지혜를 추구했다. 지혜를 찾는 그리스인 입장에선 십자가가 무것으로 보였을까? 바보, 어리석음으로 보였을 것이다. "거 바보 아냐? 아니 메시아라면서 왜 당하기만 한느 거야. 멋지게 역전 뒤집기를 해야지. 그래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거야. 그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말도 안 돼!" 따라서 그리스인에게 십자가를 복음으로 선언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이고도 남았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것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죽음을 통해서 부활이 드러났다. 인간의 한계를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신앙인의 눈에는 십자가를 통해서 어리석음이 아니라 더 큰 지혜가 드러났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에서 부부싸움이 일어날 때를 생각해 보라. 지혜로운 사람이 이기려고 하는지 져주는지? 지혜로운 사람은 져주지 않는가. 만일 예수님께서 힘으로 로마 세력을 정복했다면 예수님은 한 시대를 풍미한 혁명가는 되었을지언정 시대를 관통하는 구원의 메시아는 결코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박해박는 사람이 누리는 여덟 번째 행복은 역설적으로 행복의 절정이며 경지다. 영성적으로는 관상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없이 '박해'는 감당해낼 수 없다. 아버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고 내 고통이 아버지의 고통이라는 일체감 없이 박해를 견뎌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희생 또는 투신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이는 위험이나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열정이 없는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어려운 경지이기에 행복의 절정이라는 것이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박해받는 이들이 누리는 축복으로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약속되었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순과 고난투성이의 현재에 영적으로 누리는 충일한 임마누엘 하느님의 임재를 가리키기도 한다. '하느님 나라'는 약속 가운데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것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이며, 여덟 가지 행복의 마침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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