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 신부님의 책 <행복선언> 중에서 p.99
.....이제 '슬픔의 영성'을 요약해 보자.
슬픔의 영성은 한마디로 위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우리가 겪은 극한 슬픔은 대부분 실존적인 슬픔이다. 곧 삶의 위기, 절망, 고통, 한계 등에 처하여 생겨나는 슬픔들이다. 어떤 연유에서건 세상적인 위로로 해소되지 않는 슬픔을 가지고 있다면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심을 믿고 희망을 붙들 줄 알아야 한다. 히즈키야 왕의 눈물 어린 기도가 바로 이런 희망의 기도였다.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가 함께 한다'는 이 행복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역경이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취적으로 도전하는 삶을 살게 해 준다.
"인생을 너무 호강만 하려고 해서는 안 돼. 살면서 고생도 좀 하고 그러는 가운데 진짜 기끔이 덮칠 때, 절망을 선택하지 마라. 희망을 선택해라."
바로 이런 희망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온다. 이 위로는 결코 값싼 위로가 아니다. 자동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희망을 택하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마주치는 고통이나 슬픔 이런 것들이 너무나 혹독하여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실은 그 기저에 엄청나게 큰 위로가 그것을-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사막의 영성가 샤를르 드 푸코(1858-1916)가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자.
"울고 있는, 무죄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희망을 품고 또 품자. 육체적인 고통이나 영혼의 괴로움 떄문에 울고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품자. 그 고통이나 괴로움은 연옥 역할을 하고, 하느님께서 우리 잘못을 속죄하고, 우리가 그분을 향햐 눈을 들게 하며, 우리를 정결하게, 거룩하게 하시려고 그 고통과 괴로움을 활용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운다면 희망을 더욱 더 품자. 왜냐하면 이러한 자비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러일으키신 것이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죄에 대해 울고 있다면 희망을 한층 더 품자, 왜냐하면 이러한 뉘우침은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 영혼 안에 불러일으키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순수한 마음으로 울고 있다면 희망을 더욱더 품자.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광과 다른 영혼들의 성화를 위한 이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러일으키신 것이고 매우 큰 은총이기 떄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보고 싶어서, 그분과 떨어져 있는 것이 괴로워서 울고 있다면 희망을 품자.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열망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울고 있는 이유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한층 더 희망을 품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바라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그분의 영광만으로 행복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울고 있다면 한층 더 희망을 품자. (...)"
어떤 슬픔이 되었건, 궁극적으로 이 슬픔은 현세에서의 슬픔이다. 이 슬픔은 마지막 날에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4)
마침내 슬픔이 끝나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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