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역시 '위로자'셨다. 어느 날,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을 놓고 곡을 하는 유다인들과 함께 우셨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3.35)
사실 예수님은 잠시 뒤 라자로를 다시 살리기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우는 사람한테 일반적으로 제일 실용적인 위로는 무엇인가? "울지마, 울지마, 내가 다시 살려주면 되잖아~." 그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눈물을 흘리셨다. 필자는 이를 곰곰이 묵상해 봤다. 왜 그러셨을까? 곧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지금 이 사별의 눈물은 라자로의 가정뿐 아니라 집집마다 시대마다 있다. 이 슬픔은 앞으로 모든 시대 모든 지역 사람들의 운명이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의 슬픔을 같이 느끼시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심으로 오늘의 우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인류의 슬픔에 동참하고 계신 셈이다!" 그러기에 집안에 초상이 났다면 기억하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하러 문상객으로 오신다는 것을.
-- 차동엽 신부님의 책 <행복선언> 중에서 p. 55 ----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차동엽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온유 (0) | 2010.07.29 |
---|---|
슬픔의 영성 (0) | 2010.07.29 |
성체 (0) | 2010.06.27 |
차신부님의 향주삼덕 강의 - 이은숙님 글 (0) | 2010.05.21 |
참 믿음 (0) | 2009.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