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어둔 밤

김레지나 2010. 5. 15. 22:19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6주간 목요일 - 어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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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의 시성 조사를 맡으셨던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거의 전 생애가 어둔 밤이었습니다. 마지막 30년간은 영적으로 특별한 것을 체험한 것이 없으셨고 매우 메마른 기도생활을 하셨습니다.”

‘어둔 밤’이란 내면에 있던 하느님의 빛을 잃어버리는 때입니다. 즉, 그 전까지 기도할 때 많은 것을 깨달아 기쁘기도 하고, 그 분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며 기도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어둔 밤이 찾아오면, 기도의 맛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사막을 걷는 것과 같게 됩니다.

사실 ‘어둔 밤’을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은 어둔 밤을 느껴보았을지언정 성인들이 겪는 참된 어둔 밤을 경험해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작은 어둔 밤을 겪게 됩니다. 즉, 기도가 메마르고 재미없고 힘들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되는 때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이 단계를 거치셨습니다. 그분께서 어둔 밤일 때가 언제였는가는 그 분이 부르짖은 말씀 때문에 너무나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도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잃어버린 고통을 겪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하느님을 외면하기 위해 스스로 눈을 감아버려 그 분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보속이었습니다. 인간이 먼저 죄를 위해 하느님을 외면하였기에 하느님도 인간을 외면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 지옥의 어두운 고통을 우리를 대신해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 ‘어둔 밤’이 바로 ‘믿음을 증거하는 시험대’가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버리셨다는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모르시지만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어둔 밤은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존재의 빛을 거두어 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영혼이 빛에 더 가까이 감으로써 빛을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웬만한 빛을 볼 수는 있지만 태양과 같은 큰 빛은 직접적으로 볼 수 없고 그것을 바라보며 계속 다가간다면 오히려 시력을 잃어 모든 것이 검게 보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어둔 밤은 믿음이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큰 믿음을 가진 이들을 더 큰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 주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이 어둔 밤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삼년을 함께 계시며 그들의 빛이 되어주셨지만 이젠 그들에게 어느 정도 어둠의 시대가 도래 할 것임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어둔 밤의 때에도 당신께 대한 믿음을 지켜 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어 세상에 빛이 사라졌을 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고통 가운데 참답게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그들에게는 귀중한 진보의 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어둔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지만 결국 그 경험으로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할 믿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려움이 닥쳐오자 정말 하느님이 당신을 버렸다고 하며 믿음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어둔 밤의 예고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적 메마름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셨던 마더 데레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은 하느님께서 보상으로 주시는 영적인 즐거움 안에서 일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 메마름 속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평생 이웃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셨기에 참다운 성인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둔 밤을 겪고 있으면 세상은 ‘저렇게 될 줄 알았다.’하며 좋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새로운 영광의 빛을 다시 보게 될 것이고 세상은 그 빛이 두려워 영원한 어둠으로 몰려나고 말 것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임신하여 온 마리아를 보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둔 밤을 잘 참아내고 결국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것을 알고는 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기도가 재미가 없고 메마르고, 세상 적으로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 날 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지금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은총의 ‘어둔 밤’이 아닌지를 말입니다.

 

<<짧은 묵상>>

제가 제일 갖고 싶은 마음이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너무 이성적으로 살기 때문에 마음이 차가워져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신생아들은 다른 아이의 울음을 듣고 저절로 따라서 울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울음소리를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들려주면 자신의 울음소리로는 울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아픔을 느끼는 좋은 심성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고 세상에 나와 살게 되면서부터 다른 이의 고통을 먼저 ‘동감’ 하기 보다는 ‘판단’하게 됩니다. 남의 아픔보다는 먼저 나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볼 때는, ‘왜 저렇게 살까?’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상대가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하는 한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죽고 부활하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빛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한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어머니도 아이의 아픔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처럼 사랑은 같이 기뻐하게 하고 같이 아파하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모님께서 골고타에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머니만큼 아드님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어머니는 아드님과 한 몸으로써 차원이 다를 수는 있지만 거의 같은 고통을 겪으십니다. 한 몸이 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고통의 무게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일치를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픔을 겪어야만 하신다는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성모님이 서로 한 몸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 구원도 완성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자신을 ‘만지지 말라’라고 하신 것처럼 죄인인 우리들은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완전한 일치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한 삼위일체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와 온전한 관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의 고통에 가장 근접하게 느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 슬픔에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슬픔은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너희가 기뻐하게 될 것이다.”

 

 

 

<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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