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생명의 빵

김레지나 2010. 4. 24. 16:58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3주간 목요일 - 생명의 빵

 

 

 

대학 교수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처음에 개신교에 다니다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자매님은 영성체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개신교 다닐 때는 말씀으로만 영하던 그리스도의 몸을 이젠 직접 살과 피로 모시게 됐는데 어찌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전 제가 이상한 건지 당연한 듯이 받아 모시고 들어가는 신자들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체가 무엇인지 더 깨달아나가야 합니다.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사제들이 자신들이 축성하는 성체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 대학 다닐 때 대학에서 어떤 신부님과 야외미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미사가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전례를 한국식에 맞게 토착화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심을 알려주기 위하여 서양적인 음식인 빵과 포도주대신 떡과 막걸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몰랐지만 신학을 조금 배운 지금 그런 토착화는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를 위한 제물로 결정하셨다면 이것은 바뀔 수 있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바뀔 수 없는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멜키세덱의 대를 잇는 대사제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빼앗겼던 자신의 식솔들과 재산을 되찾아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지나게 됩니다. 그 때 (예루)살렘의 왕이자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인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나기 위해 나옵니다.

아브라함 때는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온 이스라엘 지방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왕(멜키세덱)이자 평화의 왕(살렘: 평화)인 멜키세덱에게 자신의 재산 중 십분의 일을 바치며 하느님께 축복을 빌어달라고 합니다. 멜키세덱은 하느님께 ‘빵과 포도주’를 바치며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빌어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성조 중의 성조였다면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치고 축복을 청하였던 멜키세덱은 모든 이스라엘 성조보다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대사제 멜키세덱으로 역시 빵과 포도주를 주님께 바칩니다. 빵은 당신의 몸이고 포도주는 당신의 피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이미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빵은 밀을 빻고 물로 반죽하여 불에 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가 죽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고 하시며 당신이 죽어야함을 예고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밀알인 것입니다. 이 밀알은 부서지고 잘게 갈려집니다. 사제가 빵을 자르는 것도 그리스도의 심장이 찢겨짐을 상기시켜 줍니다. 밀이 빵이 되는 과정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게 합니다.

즉, 당신의 죽음으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나누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죽고 우리는 살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를 영할 때 우리가 영하는 것은 단순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영하는 것입니다. 그 성체가 생명나무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심장을 찢어 주시는 동시에 그 속에 당신 자신이 들어가 계십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는 그분의 살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영혼과 육체를 모시는 것이고 나의 영혼과 육신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함으로써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일치는 성체를 영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엔 나를 죽이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생명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짧지만 하느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전거의 페달을 멈추면 자전거는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매 순간 ‘지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실까?’를 끊임없이 물어보며 내 의지가 아닌 그 분이 사시는 것처럼 살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마치 최후의 만찬 때 첫 영성체를 한 사도들이 세상의 무서움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것과 같습니다. 그분과의 일치가 삶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아직 생명의 양식은 내 안에서 참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혼인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매 순간 잊지 못합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죽이신 그 분을 생각하며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산 순간만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짧은 묵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하인을 하란 땅 자신의 친척들이 사는 동네로 보냅니다. 그 곳에서 자신의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구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인은 우물가에서 레베카를 만나 이사악에게 데려오고 둘은 그렇게 혼인하게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여 자기 옆에만 끼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좋은 짝을 찾아서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참 부모의 도리일 것입니다. 자녀를 며느리에게 빼앗긴다는 생각은 아직은 아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정말로 사랑한다면 자녀에게 아브라함처럼 좋은 짝을 찾아 주어야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찬가지로 자신의 하인인 가브리엘을 나자렛으로 보냅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시며 성자와 한 몸을 이룰 것을 서약하십니다. 이로써 성자는 마리아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우리 각자와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해 신부를 마련해주시고 아들에게 그 신부를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우리가 원하기 이전에 성부께서 우리를 아드님께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의 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 다른 누구를 사랑한다고 해서 질투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할 상대를 소개시켜주는 사랑입니다.

만약 부부가 자신들만 알아서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은 자녀만을 사랑해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들 품에만 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 대한 사랑, 부부간의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이런 사랑들은 서로간의 사랑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사랑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고 점점 더 커지는 본성이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