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는 것

김레지나 2010. 4. 24. 16:52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3주간 월요일 - Not doing but being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는 것)

 


 

전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을 지닌 무서운 존재가 자신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척박한 사막이 아닌 곳에서 평범한 동물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짐을 싸서 습지로 내려왔습니다.

습지에 사는 동물들은 전갈이 자신들을 공격하러 온줄 알고 겁을 먹었습니다. 전갈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살고 싶어. 난 다른 전갈들과는 달리 공격적이지 않아.”라고 하며 그들을 설득했고 개구리들이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이 개구리인양 그들과 잘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들이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풍을 가던 중 개울을 건너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전갈과 그의 절친 친구 개구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전갈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등에 태우고 좀 이 개울을 건네줘.”

그러자 친구 개구리는 그가 개구리처럼 살기는 하지만 개울을 건널 수 없는 자신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독침으로 나를 찔러서 죽일 거잖아.”

전갈은 말했습니다.

“바보야. 네가 죽으면 나도 물속에 빠져서 죽잖아.”

그렇게 하여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갈은 개구리 등 뒤에서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는 개구리가 될 수 없구나!’

그는 자신의 본질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여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본질이 전갈이었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변하게 마련이지만 유다는 그렇게 행동으로 보이려고만 했을 뿐 진정 자신의 본질은 변화하려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아니 위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속여가면서 더욱 사탄의 본질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개구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독침으로 자신을 가장 사랑해준 그리스도를 찔렀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제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묻지만 “제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라고는 잘 묻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본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육체적인 만족을 얻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지 그 본질적인 뜻을 깨달아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리고는 육체를 만족시키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적인 양식을 구하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계속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물어보지 어떤 본질의 인간이 되어야하는지는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행위보다는 믿음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은 거창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나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행위는 존재를 따릅니다. 그러나 본질이 나쁜 사람도 어느 정도는 위선적으로 착하게 보일 수는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안 하는 것보다도 자신의 본질을 전갈에서 정말 개구리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 흉내를 낸다고 해도 그는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원숭이 흉내를 내도 그는 원숭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본질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영적인 양식이 바로 우리 믿음을 키우고 우리 본질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매일의 양식을 청하는 것인 바로 이 생명의 양식을 청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당신의 몸입니다. 바로 성체가 될 수 있고 또한 당신의 말씀, 즉 성경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신앙인은 성경과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성체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먼저 믿음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성체를 합당하게 모시고 은총도 그만큼 크게 받습니다.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더 믿기 위해서, 즉 더 사랑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면 영적으로는 매일매일 밥을 굶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매일 양식을 먹고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해 나갑시다.

 

<<짧은 묵상>>

어떤 사업가가 수도회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신자임에도 종교의 구분 없이 가톨릭 수도회를 도와주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은 이윤이 나면 수도회를 돕고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조금은 자선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광고에서는 자신들의 자선을 보여주면서 기업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도 합니다. 사실 자신을 위한 자선은 육체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보면서 어떤 유명한 목사님의 십일조 설교가 연상되었습니다.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몇 배로 갚아주시지만 하지 않으면 집 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서 반드시 몇 배로 빼앗아 가신다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의 본래 의미보다는 이 세상에서 복을 더 받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당신을 열렬히 찾아온 것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영적인 양식이 아니라 육적인 양식을 찾습니다. 세상에서 배부르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만큼 돈을 불어나게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 성체에 대한 상징적 기적이었습니다. 그 표징을 보지 못하고 배만 불리는 사람이라면 성체의 가치가 돈보다 작아질 수 있습니다. 즉 돈을 벌기 위해서 성체를 모시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주일날 돈 벌기 위해 미사를 궐하는 경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진 보물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나머지 것을 모두 빼앗아 가시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바쳐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당하시는 것을 가슴아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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