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3 주일 -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오늘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사랑을 확인할 때 어떤 누구도 한 순간에 세 번씩 사랑을 확인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하룻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또박또박 다 합니다. 백번을 물어보았다고 한다면 백번 다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그만큼 완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세 번씩 반복해서 물어보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베드로에게 당신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가 가장 완전한 사랑이듯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당신의 양떼를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신 다음 “내 양떼를 잘 돌보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양떼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면서 동시에 당신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십니까? 바로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이 주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주인의 양떼도 사랑하지 못하고 쉽게 잃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도 아버지로부터 맡겨진 양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양떼 중 한 마리도 잃지 않았습니다(요한 17,2).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양떼를 한 마리도 잃지 않으셨던 이유는 아버지를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양떼도 잃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하시던 소명을 베드로를 대표로하는 교회에 맡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한 마리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수시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신 모범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였습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물어보시는 그 세 번의 사랑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면 굳이 세 번씩이나 물어보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사랑의 척도로서 우리도 그 세 번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제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꼈을 때는 그 사람이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생각이 나고 꿈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운 사람만 자꾸 생각이 나는 줄 알았더니 사랑하면 그렇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첫 번째 질문은, “너는 나를 항상 ‘기억’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랑을 우리가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성찬의 전례를 제정하면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모님은 성전에서 잃었던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다.’라고 합니다.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랍뿌니’, 즉 ‘스승님’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배우고 기억한다’는 의미이지만 동시에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해 그 분과 한 몸이 된다고 하면서도 살아가면서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매 순간 그 분을 기억해내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그 분과 한 몸이 된 것도 그 분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이니 당신 안에 항상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고 기억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 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고 말하시고 행동하셨을까?’를 떠올리며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 때 바로 ‘너 나를 사랑하느냐?’의 첫 번째 질문에 베드로처럼 당신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랑을 하면 또 변하는 것이 있는데 상대 앞에서 계산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돈을 쓸 때도 계산을 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은 무엇이든 퍼 주고 싶어집니다. 일명 제비들이나 꽃뱀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어서 다 뜯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카인의 제물을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지 않은 것은 그가 아까워하며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봉헌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미 하느님과 계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병적조사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자신이 숫자를 세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게 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때도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계산을 합니다. 200데나리온어치를 사도 안 된다고 하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베타니아에서 한 여인은 300데나리온어치나 하는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발라드립니다. 지금으로 치면 2000만 원 정도 하는 향유를 단숨에 쏟아버리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어야 한다며 그녀를 나무라지만 사실 그것은 그가 계산만 하고 사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자비로운 척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았기에 하느님께 아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과부가 몇 푼 안 되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넣었을 때 그것을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봉헌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일조를 내는 일’입니다. 만약 그것도 바치고 있지 못하다면 여전히 우리는 계산을 하며 사는 사람이기에 두 번째 예수님의 질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감히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사랑하면 느끼는 것이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그 사람부터 생각이 납니다. 경치 좋은 곳에 가면 ‘그 사람을 데려왔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상대가 먼저 떠오릅니다.
저희 어머니는 생선 머리만 드셨고, 밭에서 일하고 받았던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고, 우리가 삼겹살을 먹을 때는 배부르다고 드시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대를 위해서 ‘나를 잊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생각하셨다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통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잊으시고, 아니 버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나’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찾는 것을 우리는 ‘이기주의’라고 하고 사랑의 반대말로 여깁니다. 나를 죽일 때 비로소 상대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며 그를 ‘사탄’이라고 하였고, 오상의 비오 성인은 자신의 ‘자아’가 바로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자기 비움이 없었다면 구원은 거기에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그 분의 자기 비움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 분이 성모님의 육체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마지막 세 번째 질문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 극도로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제 자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탄이라 불렸던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번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할 수 있었고 교회의 첫 번째 수장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시는 만큼 당신 귀한 양떼를 맡기십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기 이전에 그 분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항상 점검하고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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