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토요일 - 믿음이 주는 평화
이집트 성지순례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새벽에 시나이 산에 올라 해가 뜨는 장엄함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해가 끝없는 붉은 돌산들 저편에서부터 떠오를 때는 정말 장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벽에 산을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낙타를 타고 올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걸어 올라갑니다.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 중에는 낙타를 타는 것이 무서워서 일부러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 낙타를 탔는데 낙타가 일어서니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낙타는 줄을 지어 한 쪽이 낭떠러지인 길을 따라 산을 오릅니다. 옆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지만 그래도 뒤뚱뒤뚱 산을 오를 때는 이 동물에게 나의 생명을 맡겨도 되나 싶은 의문이 자꾸 듭니다.
이 동물은 이상하게 안전한 쪽이 아니라 낭떠러지 쪽으로만 걷습니다. 수 없이 낭떠러지로 낙타의 발에 치이는 돌들이 굴러 떨어집니다. 단 몇 센티만 옆으로 디뎌도 낙타와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질 판이라 매우 겁이 납니다. 낙타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며 걸어갑니다.
그렇게 위태위태하며 올라가는데 갑자기 옆에서 고삐를 잡고 함께 오르던 원주민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낙타는 그저 본능대로 걷기만 합니다. 정상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원주민들이 끝까지 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해하며 낙타 안장에 꼭 붙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낙타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아슬아슬 벼랑 가장자리로만 걷지만 불안해 해 봐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낙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늘의 별들을 보며 야경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 믿음을 가지게 되면 편한 마음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낙타가 그렇게 믿을 동물이라면 우리의 주님이야 우리 인생을 얼마나 평화롭게 만드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갈릴래아 호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물 위를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고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런 두려움이 정말 하느님을 만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첫 번째 반응입니다.
저도 성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새벽에 술 마시고 성당에 올라와 성모님께 기도하려 했는데 성모님의 동상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술이 취하여 그런 줄 알고 더 자세히 보았지만 그 분의 살갗은 정말 사람의 살처럼 보였습니다. 성모상 앞에서 성모님께 기도하는 것이 너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말 성모님처럼 보이니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감히 동상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 다시 눈을 들었더니 이젠 동상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는 주님께서 정말 나를 불러주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고 결국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렇게 1년간의 고민은 끝을 맺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보고 겁을 먹었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그 분을 영접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순풍에 돛단 듯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 풍랑을 만난 배와 같이 흔들리고 있다면 아직은 예수님을 만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분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내 자신이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 믿음을 둔다면 그 분은 착한 낙타처럼 우리를 안전하고 평화롭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실 것입니다. 내가 풍랑 속에서 노를 저으며 두려워하고 고생하는 삶을 넘어서 나에게 다가오고 계신 주님을 마음을 열어 영접해 드립시다. 그러면 그 분이 풍랑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인생을 평화롭게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해 주실 것입니다.
<<짧은 묵상>>
어떤 분에게 성체조배를 하라고 했더니 성체조배 많이 하는 사람도 잘 사는 것 같지 않더라고 말하며 성체조배를 많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살아가지 못한다면 실제로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사람을 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더 나쁘게 살 사람이었는데 그나마 기도를 해서 그 정도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산’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본래 하느님이시기에 물위를 걸을 수 있는 분이셨지만 당신의 ‘인성’을 ‘신성’과 결합시키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산’에 오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세상과 멀어져 홀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인성보다는 ‘신성’이 더 빛났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모세도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후 얼굴에서 빛이 나서 사람들이 그를 보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렇게 산은 인간의 본성을 신성화하는 장소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야만 우리 죽을 몸이 영원히 죽지 않을 영원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인들의 몸이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이유는 그 분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 자신들의 인성을 거룩하게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거룩한 에너지를 얻고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변화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변화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 저절로 많은 열매가 열리듯이 우리는 다른 노력보다 우선해서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려는 노력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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