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금요일 - 봉헌
저는 요즘, 제가 자신을 주님께 봉헌했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봉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참으로 자신을 봉헌한 삶임을 느낍니다. 무슨 말이냐면,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참으로 봉헌한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내 자신을 봉헌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주님이라면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 행동을 내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며 살아갑니다.
참으로 내 자신을 주님께 봉헌했다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살게 하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저 개인의 능력으로는 누구도 만족시켜 줄 수 없음을 압니다. 어떤 사람도 한 사람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사람일지라도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면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사람이 됩니다.
마더 데레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한 작은 수녀님이었습니다. 당신의 삶을 봉헌하니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만족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 분이 결혼했다면 한 가족을 만족시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혼해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이 기적 안에는 이 봉헌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당신께서 기적을 하시려고 작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를 시험하기 위해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질문하십니다. 필립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아직까지 주님께 청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힘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는 인간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역시 세상적인 계산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뒤집습니다. 바로 ‘봉헌의 힘’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시지 않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의 참여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을 참여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영광도 함께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이 당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을 거부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는 곧 당신의 영광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영광을 시몬과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의 빵과 물고기를 아버지께 봉헌하심으로써 기적을 얻어내십니다.
옛날 동화에 손만 대면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닿으면 보석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봉헌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남자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셨지만 인간의 참여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아이의 봉헌을 받으시고 또한 그것을 분배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심으로써 그들도 당신의 기적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지만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의 살과 피, 즉 성체, 성혈입니다. 그것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체성혈은 곧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하느님이 손을 대심으로써 보석보다 귀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는 바로 신자들이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작은 봉헌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도 우리에게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작은 봉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봉헌으로도 그렇게 큰 은총을 얻는다면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주실까요?
그러나 저의 고민은 자신을 봉헌했다고 하면서도 내 맘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 자신을 주님께 조금이라도 더 봉헌하고자 합니다.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시라고 저를 내어놓습니다. 그렇게 누구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이 주님의 도구로 많은 이들을 만족할 사람으로 쓰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써 달라고 하기 이전에 자신을 정말 주님께 온전히 봉헌해 드렸는지부터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짧은 묵상>>
예수님은 한 때 자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그들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마태 13,58) 기적은 하나의 선물입니다. 이 은총의 선물은 그것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항상 치유의 기적을 하시기 전에 그들의 믿음을 점검하십니다.
4명의 손에 들려온 중풍 병자도 그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해 주셨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마르 2,5) 물론 베짜타 연못에서는 38년간 움직이지 못했던 병자를 그저 일어서 가라고만 하십니다. 그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 걸어갑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5,8)
그러나 오늘 5천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는 누구도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지 못합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까지도 세상적인 계산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의 믿음도 요구하지 않고 이 엄청난 기적을 행하십니다. 여기엔 신비로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곧바로 ‘성체와 성혈’에 관한 예수님의 계시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 기적이,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내려오게 한 것처럼, ‘성체성사’와 관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두주가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그리스도 자신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믿음도 이것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믿음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완전한 기적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세상에 생명의 양식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었던 기적은 마리아의 믿음을 통해서였습니다. 마리아는 흠 없는 믿음으로 흠 없는 기적, 즉 생명의 양식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생명의 양식으로 내려오게 하심을 넘어서서 바로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성체성사에도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십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께서 교회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없이는 어떤 누구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고, 따라서 성체성사도 거행되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지금도 교회의 일원으로써 당신의 완전한 믿음으로 성자를 잉태하여 사람이 되게 하신 그 신비를 영원히 유지되게 해 주시는 교회의 보이지 않는 믿음이 되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모님이 없이는 성자께서 순결한 육체를 취하시어 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듯이, 그 분의 믿음 없이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변화의 기적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완전한 단 한 분이신 그 분의 신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믿음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성체를 통하여 한 몸이 되는 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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