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목요일 -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
저는 어렸을 때 매우 시골에 살았습니다. 시골인데다 비행장이 가로막혀 있어서 전기까지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제 나이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덕분에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때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예로 텔레비전을 보려 해도 그 전에는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하여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즉, 배터리를 자전거에 싣고 배터리 충전하는 곳에 가서 얼마의 돈을 주고 배터리를 충전하여 다시 가져옵니다.
한 일주일정도 텔레비전을 보다보면 양 옆에서부터 시작하여 화면이 조금씩 검어집니다. 배터리가 다 됐다는 증거입니다. 조금 더 있으면 화면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배터리를 싣고 충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꼭 재밌는 프로가 시작되려할 때 그렇게 배터리가 다 되어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충전한 만큼만 불을 켜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자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온 가족이 전기밥솥 앞에 앉아 밥이 저절로 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습니다. 배터리를 충전하러 갈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끔 전기가 나가면 암흑으로 바뀌고 다시 초를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가 연료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에너지를 충전한 만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연료가 없는 자동차는 아무리 고급차라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에너지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에너지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고 그 에너지를 부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라.”
즉,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성령의 에너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전기 끊어진 집처럼, 연료 없는 자동차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더 나아가 ‘사랑’도 나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사랑해야 행복한 것은 알지만 사랑하기 위해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우리 마음은 마치 기름통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사랑 없는 죽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한 신부님께 이렇게 고해했다고 합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다 싫은데, 그 중에서 특히 몇몇은 더 싫어요.”
단 한명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사랑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에너지가 없으니 사랑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에너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아들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그만큼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 즉 성령님을 부어주셨고 그 성령님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를 아무리 해도 사람이 용서되지도 않고 사랑하기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보다도 나의 마음이 상처 나서 깨져있지는 않은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따라서 먼저 악습으로 인해 나의 마음의 그릇이 깨져있지는 않은지 먼저 돌아보고 깨끗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 만큼의 성령님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내 힘으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내가 하느님이 되는 교만함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만큼 행복하기 위해서, 먼저 나를 깨끗이 해 주십사, 그리고 성령님을 충만히 보내 주십사 청합시다.
<<짧은 묵상>>
사람은 자신이 관심 갖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각자가 다 관심분야가 다르고 그 관심분야가 이야기의 소재거리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고 당신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데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누구도 그분의 증언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 ‘아무도 그 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아무도 당신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당신이 어떻게 세상에 오실 수 있으셨을까요? 성모님조차도 당신의 증언을 온전히 받아들이시지 못하셨다는 말일까요?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주셨다고 합니다. (요한 3,16) 누군가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현재형’을 쓰고 있습니다.
즉, 당신을 받아주신 분은 성모님이고 그래서 모든 여인들 중에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누구도 성모님만큼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큼 죄에 갇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분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더 많이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워지지 않은 그릇엔 무엇도 채워 넣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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