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32. 예루살렘 귀환과 유다교 태동 - 에즈라, 느헤미야

김레지나 2008. 9. 28. 18:53

성경교실 (구약) : 자료 - 32


예루살렘 귀환과 유다교 태동



*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기원전 538년- 400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전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에즈라’라는 이름으로 한 권이었는데, 라틴어 성경에서 두 권으로 분리된 이후 그 책의 중심인물을 따서 현재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두 권의 책이 전하는 역사적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즈 1-6장, 느헤 1-7장 ; 11-13장 ; 에즈 7-10장, 느헤 8-10장의 순서로 읽는 것이 좋다.



* 돌아온 유배자들


 기원전 538년 키루스 왕의 해방칙령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인의 숫자가 오만 명에 이른다는 기록은 몇 세대가 지난 후인 느헤미야 시대에 행해진 광범위한 인구조사의 결과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적었고, 이러한 귀환도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 예루살렘 제 2 성전


 기원전 536년 예루살렘 제 2 성전의 기초를 놓았지만 지방 주민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16년 동안 공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515년 완공하여 봉헌했다. 새 성전은,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이스라엘 생활의 중심이자 보루가 되었다.



* 느헤미야


 페르시아 궁전에서 왕의 총애를 받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동족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에게 간청하여 기원전 445년 예루살렘 지방관(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하고 유다 공동체를 조직했으며, 안식일 규정 준수와 혼종혼 금지를 실행에 옮기는 개혁을 단행했다.


* 에즈라


 에즈라는 바빌론으로 귀양을 갔던 사제이며 율법학자였는데,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율법과 페르시아 국법으로 예루살렘의 질서를 바로잡으라는 사명을 받고 기원전 428년에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는 유다 백성에게 혼종혼 금지, 안식일과 안식년 규정 준수, 성전 전례와 제물 봉헌 규정 준수 등을 서약하게 했다. 에즈라는 유다인들의 생활과 종교가 율법의 틀에 따르도록 기초를 확립함으로써 ‘유다이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 율법주의와 유다이즘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 공동체는 하나의 국가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율법주의가 강조된 것은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의 생존문제와 예루살렘의 영화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율법주의로 성전의 의식도 차츰 공허한 형식이 되어갔고, 율법은 사소한 것들로 과중한 부담을 주든가 아니면 교묘하게 뒤틀어 해석해서 하느님의 요구를 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갔으며, 순수 혈통주의는 배타적 민족주의로 흘렀다. 이러한 율법주의에 대한 집착은 예언의 정신을 질식시키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에즈라 시대 이후 예언의 시대는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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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기도하는 이스라엘


* 읽어야 할 성경 :

 - 찬미 시편 (8 ; 19 ; 29 ; 33 ; 67 ; 95-100 ; 111 ; 113-114 ; 135 ; 136 ;                      145-150 등)

 - 감사 시편 ( 18 ; 30 ; 32 ; 34 ; 40 ; 66 ; 118 ; 124 ; 129 등)

 - 탄원 시편 ( 3 ; 37 ; 49 ; 73 ; 78 ; 112 ; 119 ; 128 ; 133 등)

 - 교훈 시편 ( 1 ; 37 ; 49 ; 73 ; 78 ; 112 ; 119 ; 128 ; 133  등)


* 성경구절 쓰기 : 시편 1 ; 22 ; 29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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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2008년 4월 30일, 김양진 선생님의 강의 정리입니다.)



예루살렘 귀환과 유다교 태동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B․C 538년 - 400년의 이스라엘 역사

예루살렘 귀환 이후 제 2 성전 건축과 공동체 재건 과정

(우리가 잘 살려면 공기도 좋아야 되고, 물도 좋아야 되고, 먹는 음식도 좋아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 소 수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중략.......정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정치가 오염되면 공기가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는 것과 같습니다. )

오늘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공부합니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이스라엘 역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귀환한 후부터 기원전 538년- 400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귀환한 유다인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다시 구성하고 성전을 다시 짓고 어떤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원래 히브리 성서에서는 두 권이 한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권을 함께 공부합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에즈라’라는 이름으로 한 권이었는데, 라틴어 성경에서 두 권으로 분리된 이후 그 책의 중심인물을 따서 현재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역사적 이야기의 연속성

두 권의 책이 전하는 역사적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즈 1-6장, 느헤 1-7장 ; 11-13장 ; 에즈 7-10장, 느헤 8-10장의 순서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강의도 이 순서에 따릅니다.




<포로들이 귀환길에 오르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해방칙령을 내립니다. 키루스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을 자기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에즈 1,2-3)

키루스는 정복자이지만 온화한 왕이었습니다. 민심을 잘 읽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정복했던 나라의 백성들이 믿는 신들을 그대로 믿게 하고, 파괴된 신전을 다시 지을 수 있게 해줍니다. 키루스는 유다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고, 이스라엘인들이 성전을 짓도록 후원했습니다.  바빌론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성전 안의 제사지내는 기물을 약탈해갔었는데. 키루스는 그 기물들도 돌려주고 포로들을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합니다.

“세스바차르는 유배자들을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오면서, 이 기물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에즈, 1,11)

세스바차르는 바빌론으로 유배될 때 끌려간 왕, 여호야킴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가문을 잇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없으니 세스바차르를 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세스바차르는 유다 백성을 이끄는 영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부푼 희망과 냉엄한 현실

세스바차르는 백성들을 데리고 가면서 성전기물을 갖고 갔습니다. 유다인들은 정통 유다왕실의 지도자를 얻었습니다. 성전만 있으면 하느님께 제사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을 믿고 희망에 부풀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갔는데, 현실은 냉엄했습니다.




<돌아온 유배자>


오만 명 : 100여년 후에 느헤미야 시대에 행해진 광범위한 인구조사에서 나온 숫자

(지도를 보시면) 빨간 테두리가 엄청난 넓이의 페르시아입니다. 광대한 제국입니다.

그러면 이 때 바빌론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온 회중의 수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었다. 이 밖에도 그들의 남녀 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 있었고, 남녀 음악가가 이백 명 있었다.“(에즈 2, 64-65)

이 숫자를 다 합치면 5만 명쯤 됩니다. 이 5만 명이 일시에 다 온 게 아닙니다. 기원전 538년 키루스 왕의 해방칙령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인의 숫자가 오만 명에 이른다는 기록은 거의 100여년 후에 느헤미야 시대에 행해진 광범위한 인구조사에서 나온 숫자입니다. 키루스 왕의 해방칙령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숫자는 오만명 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귀환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돌아갑니다. 바빌론으로 유배간 유다인들은 상술이 뛰어났습니다. (요즘 시대에도 유다인들은 상술이 뛰어납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바빌론에서 차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그들은 폐허로 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 살 맘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생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의 이스라엘 포로들은 바빌론에 눌러 살았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살겠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다.>


예배의 공동체, 제관들의 왕국

“예수아가 일가 사제들과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과 그의 형제들과 함께 나서서, 하느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쓰인 대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번제물을 올릴 제단을 쌓았다.”(에즈 3,2)

하느님께 충실하겠다는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돌아가 제단을 쌓았습니다. 예수아는 대사제입니다. 즈루빠벨은 세스바차르의 아들입니다. 즈루빠벨이 다윗가문을 이었지만 왕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다지방은 독립국가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때의 이스라엘사람들은 이스라엘 왕국, 유다왕국의 백성이 아닙니다. 즈루빠벨이 이스라엘로 왔지만 나라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단지 나라가 없는 백성들이 하느님께 대한 제사로 구심점을 삼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공동체라기보다는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공동체였습니다. 왕이 없으니 제관들이 대장이었습니다. 제관들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짓기 시작하다.>


기원전 536년 기공

귀환한 이스라엘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전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성전은 바빌론에게 정복당할 때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짓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주님의 성전 기초를 놓을 때, 예복을 입은 사제들은 나팔을 들고, 아삽의 자손 레위인들은 자바라를 들고, 이스라엘 임금 다윗이 지시한 대로 주님을 찬양하려고 제자리에 섰다.”(에즈3,10)

다윗왕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왔던 왕입니다. 다윗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고 설계는 했었지만 성전건축을 못하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느님께 제사드릴 때 쓸 음악, 시편을 만들었고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윗왕 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지침대로 성전을 지으려고, 자바라 등등의 악기를 들고 기초를 놓습니다. (미사전례에서 성가가 중요합니다. 귀환한 포로들 중에 음악가가 200명 있었습니다. 성가대가 전례에 아주 중요합니다. 성가대원들은 자부심을 가지시길..)

기원전 536년에 귀환하고, 2년밖에 안되어 성전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급히 서둘렀지만 쉽게 될 리가 없었습니다.




<성전 건축이 방해를 받다.>


지방 주민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성전건축 협력 제안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지내던 곳에 다른 누군가가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에돔인 같은 비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옛날 주인들이 오니 서로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비유다인들은 이런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안정을 찾기 위해서 귀환한 유다인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즈루빠벨과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성전을 짓게 해 주시오. 아시리아 임금 에사르 하똔이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올라온 날부터, 우리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제사를 드려 왔소.”(에즈 4,2)

예루살렘은 페르시아의 사마리아 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원래는 이스라엘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망했고, 아시리아는 유다인들은 아시리아에 끌고 갔습니다. 아시리아는 이방민족들을 사마리아에 불러 살게 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티벳지역에 한족을 보내서  소수민족의 한족화를 꾀하듯이...) 사마리아에 있던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들과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사마리아지역에 들어와 살면서 모세오경을 받아들이고, 자기들 나름대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입장에서는 유다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것이 주도권을 뺏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같이 짓자.”“같이 섬기자.”고 협력요청을 합니다.

“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성전을 짓게 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거부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의 협력요청을 유다인들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냐면 유다인들이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살던 땅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배타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래서 거부합니다.

그러자 든든한 기반을 갖고 있어 유다인들보다 세력이 커졌던 사마리아인들이 방해공작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 지방 백성은 그 집을 짓지 못하도록 유다 백성의 기를 꺾고 겁을 주었다. 그들은 또 고문관들을 매수하여, 페르시아 임금 다리우스가 통치할 때까지, 곧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통치 기간 내내, 유다인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에즈 6,15-16)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보다는 사마리아인들이 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페르시아 속주였고, 유다까지 관할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페르시아 왕에게 얘기해 성전건축을 방해합니다. 16년 동안 공사를 못하게 훼방을 놓습니다.


B.C 515년 준공 : 생활의 중심이자 보루

우여곡절 끝에 공사를 재개하여 기원전 515년에 드디어 제 2성전을 준공합니다.

“그리하여 이 집이 완공된 것은 다리우스 임금의 통치 제육년 아다르 달 초사흗날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은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다.“(에즈 6,15-16)

대단히 기쁜 일이었지만 유다인들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초라한 성전을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제 2 성전은 비록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의 보루가 됩니다. 제 2성전은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약 600년 동안 제 2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의 중심이자 신앙의 보루역할을 했습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돌아온 유배자들은 첫째 달 열나흗 날에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에즈 6,19)

파스카 축제는 과월절 축제입니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호로 풀려남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과월’이란 죽음이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과월절 축제는 하느님의 업적을 기리는 축제입니다. 새 성전을 건축한 후 가장 크게 지낸 축제가 해방의 축제, 감사의 축제인 파스카 축제입니다.

귀양살이 해방 새 성전 건축 : 새로운 역사의 시작

유다인들은 파스카 축제를 지냄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선포합니다.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왕실의 헌작관이었습니다. 왕실에서 임금에게 술을 따라주는 고위직이었습니다. 옛날에 독살하려면 술에 독을 탔습니다. 당연히 왕에게 술을 따라주는 직책은 왕이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페르시아 궁전에서 왕의 총애를 받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동족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에게 간청하여 기원전 445년 예루살렘 지방관(총독)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하고 유다 공동체를 조직했으며, 안식일 규정 준수와 혼종혼 금지를 실행에 옮기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이십년 니산 달, 내가 술 시중 담당이었을 때, 나는 술을 가져다가 임금님께 올렸다.“(느헤2,1 )

 느헤미야는 비록 유다인이지만 페르시아왕궁에서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유다인이 비참하게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동포가 고생하니 가봐야겠다고 간청합니다. 왕이 느헤미야를 기원전 445년에 예루살렘 지방관으로 보냅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이야기는 모세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모세도 이집트 왕실에서 호강하고 살다가 자기 동족이 노예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복구>


 이미 성전이 지어졌으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우리는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자,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읍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합시다.”(느헤 2,17)

 성벽이 없다는 것은 안전을 보장해주는 울타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성전과 성벽을 다 파괴해버렸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복구를 하자고 합니다. 성벽을 쌓음으로써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고, 성벽을 쌓는 동안 공동체가 조직화됩니다. 그 두 가지 목적으로 느헤미야는 성벽복구를 결정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복구를 추진하는데 반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새로 올라가고 무너진 곳은 메워지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산발랏과 토비야와 아라비아인들과 암몬인들과 아스돗인들이 크게 화를 내었다.”(느헤 4,1)

유다지방은 사마리아주에 속합니다. 산발랏은 사마리아주의 세금징수관이었습니다.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산발랏은 “유다땅도 내 관할인데, 성벽을 쌓고 뭐하자는 거지?”하는 생각을 합니다. 토비야는 유다인이면서 에돔땅을 지배하던 사람입니다. 에돔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항상 다투던 곳입니다. 그는 유다세력이 커지는 것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성벽복구 공사를 집요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안전을 지키고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외적으로 어려웠는데,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내부가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내부가 분열되면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저희 아내들과 함께 다른 유다인 동포들 때문에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느헤 5,1)

외적들한테 핍박을 받고 있는데, 내부갈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같은 동포인 유다인 극소수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세계가 식량전쟁입니다. 반도체 만들어서 쌀 사먹으면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 사진을 보시면 이것이  진흙쿠기입니다. 진흙에 마가린 조금 넣고 구워서 시장에서 판답니다. 배고프면 이 진흙쿠키를 사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값이 올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쌀 걱정 안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식량자급율을 50%가 채 안됩니다. 총 식량의 27%만 자급합니다. 나머지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식량 값이 자꾸 뛰면 자동차 반도체 팔아서도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유명한 식량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래에 농업과 농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가격으로도 충분한 식량을 살 수 없을 겁니다.” 베트남도 쌀 수출을 중단했습니다. 중국도 중단했습니다. 지금 석유값이 오르는 것은 공급이 부족해서입니다. 식량이 부족해지고, 쌀값이 올라가면 그 때는 돈을 주고도 쌀을 못 사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농촌에 가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습니다. 식량문제는 경제논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농민을 위한 정책을 해야 합니다.  정부는 종부세 세금 줄여서 복지 비용 줄이겠다고 합니다. 가난한 멍들고 힘든 사람에게 쓸 돈을 줄이겠다고 합니다. 부자들은 세금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지혜택 주어서 전 국민이 고루 잘 살아야 사회가 분열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 때 상황에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




<느헤미야의 개혁>


기득권 양보와 나눔 실천, 빈부격차 해소 필요

느헤미야가 사회불의를 볼 수 없어서 개혁을 합니다.

“ 여러분은 오늘 당장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집을 돌려주고, 돈과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을 꾸어 주고 받은 이자도 돌려주십시오.”(느헤 5,11)

백성들이 먹고살기 힘들게 된 것은 소수의 기득권자들 때문입니다. 소수의 기득권자들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득권자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물립니다. 고리대금업도 합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식도 노예로 팔게까지 됩니다. 느헤미야는  기득권층이 나누는 마음을 갖고, 가진 자가 해결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분열되고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사회개혁을 합니다.

(뉴타운 한다고 야단이지만 거기서 쫓겨난 세입자들은 더 험한 곳으로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상위 1%는 잘 살겠지요 재산이 평균이 30몇억....... 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게 아니라 비웃습니다. 이메가가 축산농가에 가서 “ 1억짜리 소 만들어서 팔아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의 정책을 내면 앞으로 우리 공동체는 화합하고 잘 살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선 내 주머니부터 채우려고 더 각박해집니다. 세상이 어찌될지 모르니까 내 주머니부터 채우게 됩니다. 남 돌볼 틈이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낸 뜻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서로 돕고 나누고 형제애로 공동체를 세워야 하는데, 내 주머니부터 채우게 됩니다. 형제애로 공동체 이루라는 인간 본연의 의무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자신도 이런 일에 휩쓸린다면 성당에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미사 빠지지 않고 나와서 죽어서 천당에 가려고 나옵니까? 최후의 심판 기준은 미사에 빠졌나 안 빠졌나가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 기준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물 한 잔, 밥 한 끼 주었느냐입니다. 미사 때 이런 하느님의 뜻을 매번 되새기고 실천하려고 미사에 참석하라는 것입니다. 주일미사 참례 자체가 심판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사실을 잊지 않아야합니다. )

 

B.C 433년 페르시아로, 3년 후에 예루살렘 복귀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총독으로 있다가 기원전 433년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와 보니, 나라꼴이 가관입니다.

“나는 몹시 화가 나서 토비야의 집 세간을 모두 방 밖으로 내던지고, 방들을 정결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느헤 13,8-9)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활의 중심이고 신앙의 보루입니다. 느헤미야는 성전규정을 다윗의 전통대로 해놓았습니다. 거기서 일하는 사제 레위인 봉급도 잘 주고, 기물도 제 장소에 잘 챙겨 놓으라고 했었는데, 3년만에 돌아와보니 토비야가 성전의 기물들이 있을 방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토비야는 에돔족을 통치하면서 성벽복구 공사를 훼방했던 사람입니다. 봉헌물도 제대로 봉헌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화가 나서 세간들을 전부 던져버리고 대대적인 개혁을 합니다.

성전 규정과 안식일 규정 준수, 혼종혼 금지

느헤미야는 성전규정을 준수하게 하고, 혼종혼을 금지했습니다. 혼종혼을 금지시킨 것은 에즈라 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느헤미야는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다>


에즈라 : 사제이면서 율법학자

“ 이 에즈라가 바빌론에서 올라왔는데,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다. ”(에즈 7,6)

에즈라는 바빌론에 끌려갔던 사제중의 한 사람이었고 율법학자였습니다. 에즈라는 페르시아 정부에서 유다인들을 보살피는 기구에서 일했습니다. 유다인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유다지방이 정치적으로 말썽이 없도록 돌봐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과 국법으로 예루살렘 질서 유지 임무

그런데 왕이 에즈라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합니다. 왕이 “하느님 법과 내 법으로 ” 예루살렘의 질서를 잡으라고 합니다. 에즈라는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는 율법서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유다인들은 율법과 페르시아의 국법을 지켜야합니다. 에즈라는 기원전428년에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결혼

혼종혼으로 인한 우상숭배의 위기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가서 보니, 레위인들까지도 이민족들과 혼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민족들과 혼인해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에즈 9,6)

(솔로몬이 이방인 여자들과 혼인해서 이방종교를 들여온 것이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민족의 순수성 지켜 이스라엘의 신앙 수호

혼종혼을 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순수성이 없어지게 되고 우상숭배가 창궐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에즈라는 율법을 다시 세워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이제 주 여러분 조상들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십시오. 이 지방 백성들, 그리고 이민족 아내들과 갈라서십시오.”(에즈 10,11)

신명기 법전에는 유다백성들은 혼종을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법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에즈라는 율법학자이니, 신명기 법전대로 살자면서 혼종혼을 금지시킵니다. 심지어는 이혼까지 하라고 합니다. 비정하지만 유다인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기로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유의 신앙도 못 지켜서 하느님 백성의 흔적이 없어질 위기감에서 이미 아내로 맞은 아내와도 갈라서라고까지 합니다.


율법을 봉독하다.

하느님의 말씀 : 듣기, 해석, 적용, 실천

에즈라는 백성들에게 율법서를 읽어줍니다.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느헤 8,1)

(하느님 백성이 되려면 말씀을 들어야하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고, 해석한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고, 실천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경공부를 합니다.)


초막절을 지내다.

“그래서 백성은 나가서 나뭇가지들을 꺾어다가 저마다 제집 옥상이나 뜰, 하느님의 집 뜰이나 ‘ 물 문’ 광장이나 ‘ 에프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만들었다.”(느헤 8,1)

초막절은 일종의 추수감사절입니다. 나뭇가지로 초막을 지어 일주일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헤매다 정착하고 수확한 것은 하느님 덕이니, 광야에서 조상들이 고생했던 것을 잊지말자는 의미입니다.  초막절의 하이라이트는 참회예절입니다. 지금까지 잘못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는 것입니다.


참회기도와 맹약 서명

“그달 스무나흗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루옷을 입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하러 모여들었다. 이스라엘의 후예들은 모든 이방인과 갈라선 뒤, 제자리에 서서 자기들의 잘못과 조상들의 죄를 고백하였다.“(느헤 9,1-2)

초막절을 지내고 마지막에 속죄의 제사를 지냅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받은 은혜와  역사적인 사실들, 자신의 배반의 역사를 하느님께 고하고,  지금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것을  반성하는 제를 지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맹약(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걷고, 주 우리 하느님의 모든 계명과 그분의 법규들과 규정들을 지키고 실천하며, 어기면 저주를 받겠다고 맹세하였다.”(느헤 10,30)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죽어도 좋다고, 저주를 받겠다고 맹약을 합니다.


유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기준

      정당한 출생 신분 - 혼종혼 금지

      율법에 대한 충성 - 안식일, 안식년 규정

      성전 보호에 충실 - 전례와 봉헌규정

유다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기준이 나옵니다.

첫째는 순수혈통 주의, 둘째는 율법에 대한 충성, (안식일 규정이나 안식년 규정을 꼭을 지키겠다는 서약), 셋째는 성전 보호에 충실하겠다고 서약입니다. 세 기준을 지쳐야 유다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없으니까 이스라엘 국법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유지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법입니다.


에즈라 : “유다이즘의 아버지”

유다이즘 : 종교적 공동체 - 유다교

율법주의 : 율법의 철저한 준수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 공동체는 하나의 국가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당시는 국가가 곧 종교였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유지되는 법이 율법이었습니다. 율법대로 살면서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것을 유다이즘이라고 말합니다. 이 유다이즘이 후에 유다교의 형태로 전환되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민족 공동체, 예배공동체로 지탱되는 것은 유다이즘 덕분입니다. 유다교를 믿는 사람들이 유다인들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생활과 모든 규정들을 준수하도록 만든 인물이 에즈라입니다. 그래서 에즈라를 유다이즘의 아버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유다교 창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즈라는 유다 백성에게 혼종혼 금지, 안식일과 안식년 규정 준수, 성전 전례와 제물 봉헌 규정 준수 등을 서약하게 했습니다. 에즈라는 유다인들의 생활과 종교가 율법의 틀에 따르도록 기초를 확립함으로써 ‘유다이즘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율법주의 ??? : 의무부과에 대한 (3-4줄 못 받아 썼습니다.)

율법주의의 폐해 : 공허한 형식주의적 예배

                 사소하고 과중한 부담

                 하느님의 본 뜻을 왜곡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

유다이즘은 종교적 공동체로서의 유다백성들을 이끄는 구심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좋았습니다. 백성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민족들에게 빛이 되라고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처럼 온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세상을 구원할 표상이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적 종교적 순수성,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합니다. 그래서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유다이즘을 탄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뜻으로 유다이즘이 출발했는데, 이 율법주의가 점점 강화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기쁨에 넘치고 활기에 넘쳐야 되는데, 점점 늘어나는 규정에 따라 예배드리면서 규정들을 다 지키기 힘들어집니다. (우리도 미사참석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과 피를 양식으로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니, 기쁘게 참례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미사 빠지면 고해성사 보기 싫어서 의무감으로 참석한다면 기쁘지도 않고 활기를 얻지도 못합니다.)

 안식일을 지킬 때 이렇게 이렇게 해야한다는 규정이 생겨나고, 그 규정을 안 지키면 안식을 안 지키는 것이 된다 는 식의 규정이 많이 생깁니다. 또 율법만 잘 지키면 죄 안 짓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또 율법을 왜곡해서 지키기 곤란한 것들은 슬쩍 넘어가려합니다. 또 순수 혈통주의 때문에 다른 민족들에게 배타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세계 유례없는 독선적인 공동체로 점차 변질됩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율법주의가 강조된 것은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의 생존문제와 예루살렘의 영화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율법주의로 성전의 의식도 차츰 공허한 형식이 되어갔고, 율법은 사소한 것들로 과중한 부담을 주든가 아니면 교묘하게 뒤틀어 해석해서 하느님의 요구를 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갔으며, 순수 혈통주의는 배타적 민족주의로 흘렀습니다.


율법주의 집착 : 예언 정신의 소멸

이러한 율법주의에 대한 집착은 예언의 정신을 질식시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율법주의에 집착하면서 예언정신이 소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즈라 이후로  예언자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에즈라 시대 이후 예언의 시대는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질타하셨습니다. 신약성경 보면 유다이즘이 잘못된 길로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민족 배타주의는 버려야합니다.


새로운 예언 :묵시문학의 형태로 표현

이제 새로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에즈라 이후에는 새로운 방식인 묵시문학의 형태로 예언합니다. 다니엘서가 구약의 대표적인 묵시문학입니다. 이스라엘은 나라도 못 찾고 오로지 예언자들이 말했던 메시아를 기다리는 세월 밖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아직 긴 세월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예언을 듣기 위해서 묵시문학을 공부할 것입니다. 묵시문학인 다니엘서를 배우기 전에 기도하는 이스라엘, 시편을 공부하고 지혜서를 공부한 다음에,  다시 역사서를 공부하기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