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성경교실

3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

김레지나 2008. 9. 24. 17:02

성경교실(구약) : 자료 - 3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 '주님의 종'

구약시대에는 하느님께 충실한 이스라엘이 그 종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느님의 종이었으며,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종’이다.


* '주님의 종'의 노래

 제 2 이사야서에는 네 편의 ‘주님의 종’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1. 이사 42,1-9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이사 49,1-6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3. 이사 50,4-11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4. 이사 52,13 - 53,12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 ‘고난 받는 종’

‘주님의 종’ 이 고난을 받는 것은 사람들이 범한 죄의 결과를 대신하여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평화’(‘안녕’이라는 의미를 지닌 ‘샬롬’Shalom)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얼굴을 가릴 만큼 처참한 종의 상처는 그들의 건강과 치유의 원천인 것이다.


* ‘주님의 종’이 바치는 희생제사

 ‘주님의 종’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를 바치는 자기희생을 통하여 온 민족이 하나가 되고 ‘의롭다’(의화(義化)되었다)고 선언되며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된다. 하느님은 종이 당한 모욕과 천대를 바꾸어 온 세상 앞에 그의 정의를 세워주실 것이다. 이렇듯이 ‘주님의 종’은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온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꾼이다.


*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의 종’

 신약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종’의 노래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해하고, ‘주님의 종’의 소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확신한다. 참된 해방과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 제 3 이사야서(55-66장)

 제 3 이사야서는 기원전 530-510년경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팔레스티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폐허가 된 땅, 지도자의 무능과 정치 기강의 문란, 종교 혼합 경향과 우상숭배, 공동체 건설의 난관, 성전 재건 시비 등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 참된 단식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법규를 위반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 바라시는 것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시하신 ‘최후의 심판’의 기준도 바로 이것이다.



* 은혜의 해

 희년(禧年)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째를 가리킨다. 희년에는 모든 빚을 탕감하고 모든 땅과 재산을 형제적으로 재분배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희년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희년’의 규정은 메시아가 오실 때에야 지켜질 것이다.



*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관계가 새 하늘, 새 땅으로 표현된다. 상처투성이의 세상은 창조 때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될 것이고, 죄로 얼룩진 인간들도 창조 때의 순수함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적개심과 악이 사라져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이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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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주제 : 예루살렘 귀환과 유다교 태동

* 읽어야 할 성경 :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 성경 구절 쓰기 : 에즈 1,2-3 ; 3,2 ; 3,10 ; 6,16-16 ; 느헤 2,17-18 ; 5,1 ; 5,11-12 ;                    에즈 9,5-6 ; 10,10-11 ; 느헤 8,1-2 ; 9,1-3 ; 10,30

<이하 김양진 선생님의 2008년 4월 23일 성경강의입니다.>


선거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머슴을 자처합니다. 대통령도 그렇고 국회의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받는 새경이 너무 많습니다. 머슴은 주인한테 잘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머슴들의 주인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국민들을 위하지 않고 남의 나라 머슴 노릇을 하면 안됩니다........( 나라현실에 대한 이야기..... .....생략합니다.)




<주님의 종>


주님의 종 : 이스라엘 -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종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합니다. 신약성경 처음에 보면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주님의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주님의 종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너 이스라엘, 나의 종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이사 41,8)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종입니다.

구약에서 ‘주님의 종’은 하느님께 충실한 이스라엘 백성,

        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개개인을 일컫는 말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종입니다.

예수님 이후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종입니다.

종노릇을 해야 주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경을 많이 받는 종이라면 너도 나도 하려고 하겠지만 주님의 종은 그런 역할이 아닙니다.

 제 2이사야가 전하는 ‘주님의 종’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고, 우리들 스스로가 어떤 자세로 하느님 일에 협력해야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


제 2 이사야서에  ‘주님의 종’의 노래가 네 번 나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주님의 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특정한 존재’, ‘특정한 인물’을 ‘주님의 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신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지만, 구약시대사람들은 ‘주님의 종’이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는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지금 이루어질 것인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인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신약을 봐야 구약의 예언의 의미가 되살아납니다. 구약성경만으로는 ‘주님의 종의 노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을 보아야 구약에서의 예언이 ‘이렇게’ 이루어졌구나 하고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종 - 개인,  하느님이 선택한 일꾼

주님의 종 첫 번째 노래의 앞부분은 개인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주님의 종은 하느님이 선택하고 준비시킨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주님의 종으로 이미 선택하시고 당신의 영을 부어주셔서 합당한 일을 하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이 종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공정을 세상에 전파하고 실현시키는 데 힘쓰는 일꾼입니다.


착한 목자 같은 일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이사 42,3-4)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예전의 것들을 다 뒤엎는 게 아닙니다. 일을 하면서 조용하고 성실하게 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진정으로 ‘착한 목자’같은 일꾼이 될 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그 일꾼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섬은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온 세상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수긍할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 - 예언의 실현

“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8-21)

이 마태복음 말씀이 제 2 이사야서 첫 번째 종의 노래와 같습니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여러 병자를 고쳐주시고도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이사야서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 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살아계실 당시의 유다인들은 구약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사야서를 인용해 말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종 : 이스라엘

‘첫 번째 종의 노래’ 후반부는 이스라엘 전체를 주님의 종이라 부릅니다.

“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이사 42,6-7)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해서 계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예뻐서가 아니라, 장차 온 인류와 과의 계약을 맺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온 인류와의 계약을 맺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자기들이 맺은 계약이 온 인류와 맺은 계약임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킴으로서 모든 민족들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도 억울하게 갇히거나 착취당하지 않고 모두가 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잘 살아야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잘 하면 축복을 받았고 못하면 징벌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


종 : 예언자적 사명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고 실현할 일꾼

하느님의 뜻 : 이스라엘의 구원, 온 인류의 구원

이사야는 주님의 종은 예언자적 사명을 지녔다고 노래합니다.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고 그 뜻을 실현할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하느님의 종의 역할은 하느님의 뜻, 의지, 말씀을 전파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명

“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교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것을 보고 배워서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빛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예언자 사명을 띠고 오셨고, 그 사명을 당신 제자들에게도 주셨습니다.

“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사도 13,47-48)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고난받는 종’

고난의 길 - via dolorisa

셋째 노래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입니다.

“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5-6)

주님의 종은 편안한 자리가 못됩니다. 예언자들은 배척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이 가고자 하는 길과 하느님의 길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펴고자 하는 뜻과 이 세상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뜻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고 박해합니다. 함께 있으려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핍박합니다.

고난받는 종이 걷는 길을 ‘via dolorisa’ 비아 돌로로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루살렘의 길을 ‘비아 돌로로사’ 라고 합니다. 주님의 종이 걷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 정의의 승리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보라, 그들은 모두 옷처럼 해지고 좀이 그들을 먹어 버리리라.”(이사 50,9)

하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종을 하느님께서 지켜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고난 당하는 종의 빽은 하느님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이고, 종을 핍박했던 불의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때 힘을 얻어 하느님의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는 보상을 못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승리할 것입니다. (삼성비자금 사건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그렇지만 계란으로라도 바위를 쳐야합니다. 거대한 기업이 조금이라도 반성하고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올바른 일, 올바른 정의, 공정한 요구를 할 때 기업도 반성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네 번째 노래는 세 번째 노래와 같은 주제입니다.

‘고난 받는 종’ 에 대해 더 명확하게 폭넓게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단락 - 종의 승리와 현양, 숨겨진 하느님의 계획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이사 52,13)

첫째 단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이 결국 승리하고 종의 이름이 높이 들어올려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당신 종의 승리, 하느님 당신의 승리, 세상의 악과 불의에 대한 당신의 승리를 예고 해두고, 그 승리를 얻기까지 종이 받아야 할 수난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이사 52,14)

주님의 몰골이 얼마나 핍박 받았던지 사람 꼴이 아닙니다. 비참하고 고통스런 종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이사 52,14)

사람들은 사람같지 않은 몰골을 한 사람이 나중에 승리하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종이 승리의 영광을 안기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입니다. 인간이 다 깨달을 수 없는 숨겨진 하느님의 계획을 ‘주님의 종’이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단락 - 고통, 병고 :죄에 대한 벌

“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 53,3)

둘째 단락은 임금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전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크게 고통을 당하거나 불치병에 걸리면  그 사람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서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을 동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잘못했는데, 불행을 겪으면 천벌 받았네, 시원하네, 라고 말들을 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종이 왜 그렇게 심한 고통을 당하는지를 모릅니다. 임금과 같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 벌레처럼 하찮게 여겨질 것입니다.


셋째 단락 - 무죄한 종의 수난 - 우리 죄의 대속(代贖)

            평화 shalom 샬롬 - 종의 상처 - 치유의 원천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53,4-5)

임금들이 깨닫기 시작합니다. 고통 받고 병고에 시달린 사람이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종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대속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셋째 단락에서는 무죄한 종의 수난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서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이사 53,5-6)

죄지은 사람들은 감옥에 안 가도 불안에 떱니다. 마음이 안 편합니다. ‘주님의 종’이 고통받는 이유는 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줌으로서 죄 지은 자들이 평화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샬롬’입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단순히 전쟁 안하는 상태가 아니라,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갖는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런 평화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 주님의 종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종이 겪는 고통은 죄짓고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씻고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넷째 단락 -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종, 온유하고 진실한 종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많은 예언자들이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는 예언자들이 하느님께 푸념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은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이사 53,9)

누구한테 억울하게 당하면 악에 받쳐서 비난을 못 견딥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조그만 비난도 견디지 못합니다.( 국가 원수 모독죄가 예전에는 있었습니다.)

주님의 종은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악에 받쳐있지 않고 온화한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는 때로 거짓말을 해서라도 곤경을 모면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를 피하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종은 그 곤경을 모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산상설교 - 참행복

“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이 세상에서 핍박받고 땅까지 빼앗기지만 주님의 종으로서 온유할 때, 묵묵히 자기 할 일 할 때, 나중에 하늘나라의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진 게 없다고 해서 다 온유한 사람이 다 되는 게 아닙니다. (뉴타운 때문에 표 찍어준 사람들.....)




<마지막 단락>


종의 고통과 죽음 : 하느님의 계획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이사 53,10)

첫째단락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둘째, 셋째, 넷째 단락은 임금들의 말입니다.

마지막 단락은 다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 종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계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의 고통과 죽음은 물론 세상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이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의 희생제사 : 사람들이 의화(義化)되다.

하느님의 계획은 무죄한 당신 종의 죽음을 통해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계획에 그 종이 충실히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에 따라서 하느님께 충실한 종이냐 거짓 종이냐가 가려지게 됩니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0-11)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창조 이후로 인간은 하느님의 의를 저버린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그런 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인간이 의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는 의로운 존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종을 보내시고, 그 종이 대속함으로서 그 종의 의로운 행동을 봐서 인간도 의롭다고 선언해주십니다. 주님의 종이 없었으면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 목숨을 바쳐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는 분을 구세주라고 합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어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을 구세주라고 부릅니다.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참된 해방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꾼

예수님도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은 이사야서가 말하는 '주님의 종'처럼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모든 인간의 참된 해방과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 인간들을 의롭다 여겨주셨고,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종'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주님의 종'을 통해서 받는 구원도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아무리 잘해줘도 조금 소홀하면 자식들은 "나한테 뭘해줬어?"라면서  따집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부모님 은혜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우리 부모님은 우리를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생각해야합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더 부모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좀 힘든 일을 겪으면 '하느님 약발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내가 잘 나갈 때 하느님께 감사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께 매달려야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이사 53,12)

첫째 단락에서 하느님께서 '나의 종은 승리하고 높이 들어올려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계획하신 인간 구원사업을 충실히 수행하는 종은 승리할 것입니다. 이 승리자를 통해서( 주님의 종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해서), 창조주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깨어졌던 관계가 올바른 관계로 바로잡힙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종이 당한 모욕과 천대를 바꾸어 온 세상 앞에 그의 정의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종은 하느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꾼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주님의 사랑

위로와 은총의 기쁜 소식

기쁜 소식, 복음의 대단원

이사야는 새롭게 태어나는 예루살렘.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난 예루살렘에게 희망찬 메시지를 전합니다.

“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이사 54,7-8)

제 2 이사야는 유배되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에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벌받는 기간이 다 끝나면 하느님께서 너희들을 다시 받아들여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라고 합니다.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서 고향으로 데려가고 당신 사랑으로  인도해줄 거라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 마음은 한없이 기쁩니다.

이로써 제 2 이사야서가 백성들에게 전했던 기쁜 소식, 복음의 대단원을 마칩니다.





<제 3 이사야서 (56-66장)>


키루스의 해방칙령 : 예루살렘 귀환 - 기원전 530년-510년경

제 3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입니다.

키루스 왕이 해방칙령을 내려서 바빌론에 억류되어 있던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었습니다.

제 3 이사야서는 기원전 530-510년경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팔레스티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폐허가 된 땅, 지도자의 무능과 정치 기강의 문란, 종교 혼합 경향과 우상숭배, 공동체 건설의 난관, 성전 재건 시비 등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 2이사야서가 말한 것처럼 곧 새로운 세상을 살 줄로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성전은 다 불타고, 집과 땅은 다 다른 사람들 차지가 되었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지도자들의 능력도 형편없었습니다. 공동체를 재건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성전을 다시 짓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현지에 살고 있던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종교가 뒤섞여 있어서 종교적 순수성을 되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빌론에서 풀려났지만  여전히 자기들이 누리던 페르시아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공동체를 결속하고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다음 시간에 에즈라기, 느헤미야기에서 공부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활동한 제 3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내린 약속 - 개방된 하느님의 백성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이사 56,6-7)

바빌론 유배를 가기 전까지 유다인들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보니, 세상은 넓고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흔히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면 견문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도  비극적인 바빌론 유배생활을 통해서 세상이 넓고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빌론 유배생활은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땅에서 만의 구원의 개념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됩니다. '개방된 하느님의 백성' 이라는 개념을 바빌론 유배를 통해서 갖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6-7)

하느님은 우리 뿐 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구원하신다는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선구적인 예언자들은 국수주의적 틀 안의 생각을 깨고 넓은 구원관을 갖게 해 줍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타리 넓은 구원관을 갖게 됩니다.


위로의 말씀 -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

“나는 그들의 탐욕 죄 때문에 화가 나 그들을 치고 분노가 치밀어 내 얼굴을 가려 버렸다. 배신하여 제 마음의 길로 가 버린 그들. 나는 그들의 길을 보았다.   “(이사 57,17-18)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고향으로 와 보니 집도 절도 없습니다. 대부분은 가난합니다. 그 중에서도 귀족들이나 관리들은 돈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으로 가난한 동족들의 이자를 뺏습니다. 그런 꼴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그 사람들을 이미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럼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까요?

“그러나 나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위로로 갚아 주리라. 또 그들 가운데 슬퍼하는 이들에게 나는 입술의 열매를 맺어 주리라.“(이사 57,18-19)

예언자들은 유배 이후에는 하느님께 충실한 소수의 남은 사람들 대상으로 예언합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는 사람들을 하느님은 자비로 사랑으로 돌보아 주고, 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단식

이제 새로운 환경에서 하느님의 법을 어떻게 지켜야할까요? 대표적으로 단식의 규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우리는 사순절 기간에 단식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수난,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도 있지만 더 큰 의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기 위해서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기준 -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예수님께서도 단식 규정만 지키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주일 미사 안 빠지고 잘 다녔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것 다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법규를 위반하지 않는 것만으로 천당에 가기 충분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왜 미사참례 해야 합니까? 미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다시 지냅니다.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목숨도 버리셨는데, 나도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조그만 희생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후의 심판의 기준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루살렘의 영광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새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1-3)

에제키엘서도 이사야서도 새로운 이스라엘에는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예루살렘과 함께 계시니, 그곳에서 하느님의 법이 나오고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광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생기고 그곳에서 당신의 통치를 펼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희망찬 새로운 예루살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

‘기름부음 받은 이’ 메시아 messiah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이사 61,1)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의 개념이 구체화됩니다.  왕이나 사제한테도 기름 부었지만. 미래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할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기름부음 받은 이’, '메시아' 개념이 여기서 나옵니다.


응보(應報)의 날 : ‘원수 갚는 날’

'응보' : 하는 대로 갚아 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응보의 날'은 원수를 갚는 날입니다. 원수에게 보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한테 잘 대접 받으면 “원수 갚을께"라고 말합니다.) 이 때의 '응보' 개념은 폭 넓은 개념입니다. 즉, 행한 대로 갚아주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했으면 벌을 주고, 착한 일을 했으면 보상을 주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억울함을 갚아주는 것, 그것이 응보입니다.


은혜의 해 - 희년

메시아가 오실 때에야 가능한 '희년'

'응보'라는 개념은 '희년'에서 나옵니다. 레위기에 희년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 25,10)

한주간의 일곱째 날은 안식일입니다. 일곱 번째 해를 안식년이라고 합니다. 안식년이 7번 진행되면 49년입니다. 희년(禧年)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 째를 가리킵니다.

 희년에는 모든 빚을 탕감하고 모든 땅과 재산을 형제적으로 재분배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하느님의 땅입니다. 백성들은 유산으로 받은 것입니다. 다시 형제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희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희년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었습니다. 실상 그 규정은 인간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희년’의 규정은 메시아가 오실 때에 지켜질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희년 선포 : 예수님의 메시아 선언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 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 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8-21)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를 낭독하신 후에 이사야의 예언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당신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고, 희년이 왔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 -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관계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이 실현되는 세상

              창조 때의 질서와 조화, 순수한 인간성 회복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17)

새 하늘, 새 땅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새 하늘, 새 땅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찾으러 성전에 가거나 교회를 가지 않아도 그 때에는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와 계실 것입니다. 신약의 고린토 전서에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 때는 똑똑히 보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온 인류가 온전히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가족으로 맞아들여지는 새로운 세상은 언제 올까요?  신약성서의 가장 마지막  요한 묵시록에서도 이사야서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이사야는 새로운 창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 으로, 그 백성을 ‘기쁨’ 으로 창조하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이사 65,17)

 상처투성이의 세상은 창조 때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될 것이고, 죄로 얼룩진 인간들도 창조 때의 순수함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적개심과 악이 사라져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이룩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는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 없고, 슬퍼할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고루 다 사랑받고,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이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또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면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 65,25)

새 하늘 새 땅에서는 하느님이 원래 창조하신대로의 질서와 조화의 삶이 다시 복구될 것입니다. 사자와 어린아이가 뒹굴고.... 누구나 행복을 누리는 삶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가 그리는 새 시대 -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모든 역사가 완성

예언자들이 말하고 있는 세상은 멋있고 원대하고 휘황찬란합니다. 이런 이상적인 상태는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올 수도 없었고 아직도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하고 있는 세상은 과연 언제 올 것입니까? 예언자들은 다윗 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고통 받는 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갈 그 예루살렘이 아니고, 새롭게 창조되는, 하느님이 계시는 새 예루살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복구 되어서 거들먹거리고 살게 될 예루살렘의 영광 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사야는 그런 차원을 벗어나서 온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법에 따라서,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하느님만을 섬기고  사는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들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은 온 인류가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하느님나라'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를 읽으면서,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계획이  반드시  완성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세가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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