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06년

성령세미나 - 4월 28일 ~ 30일

김레지나 2008. 8. 31. 16:50

4월 28일 금요일

 

  00대병원에서 애들 검사를 받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형주 3시간, 정훈이 3시간 검사받는 동안 기다리고 엄청난 양의 부모용 검사지를 작성하느라고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동생집으로 돌아와서 한 숨 잤다.

 

 유미가 성령세미나 교육 간다고 일찍 집에 돌아와서 같이 가자고 했다. 동생 본당에서는 마침 성령세미나가 진행 중이다. 수원교구에서는 5년에 한 번 각 본당 차례가 된다고 했다. 내가 성령세미나를 받은 지 15년이 넘었으니 요즘에는 어떤 분위기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많이 피곤했는데도 유미를 따라나섰다.

 

  봉사자들 모두가 하느님을 가슴으로 느끼고 만난 사람들일 것이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오늘 강사는 수원에 사시는 남자분이셨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이 가슴으로 느껴지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방에서 춤을 추고 다녔다고 한다. 너무 좋아서 똘아이처럼 밖으로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저요. 성당에 다니거든요. 하느님 아들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아주 행복하거든요"라고.

 물론 사람들 반응은 제각각이었단다. 별 사람 다보겠다는 듯이 피하는 사람, 정말로 성당 다니면 행복해지느냐고 궁금해 하는 사람 등등.

  나는 안다. 그 기분은 맛 본 사람이 아니고는 짐작도 할 수 없는 기쁨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세상에 외치고 싶은 충동이 얼마나 큰지를.

  나는 오래 웃었다.

 '나하고 똑같네. 나도 완전 똘아이 짓을 하고 있는데. 미친 척하고 글 올리고.'

 

  그 분이 계속 말씀하셨다.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엄청난 분량의 신학대전 12권을 쓰신 분입니다. 그분이 죽기 전에 꼭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답니다. 간절하게 기도를 했더니 어느날 하느님을 만났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내가 쓴 신학대전은 모두 쓸모없다. 하느님을 만나고자 간절히 구하고 하느님을 느낀다면 신학대전 안의 지식들이 모두 필요없게 된다. 하느님을 느끼는 체험으로 족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간절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스스로의 삶에 대체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든 간절하게 원하기가 쉽지 않다. 병자들이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의 부족함 때문에 더욱 뜨겁게 하느님을 찾고 쉽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의가 끝나고 성령봉사자들이 성가를 불러주었다. 몇몇 사람들이 감동되었는지 흐느끼는 것이 보였다. 나도 많이 울었다.

'내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주의 놀라운 사랑'이라는 가사가 들렸다.

 울음이 격해져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4월 29일 토요일

 

  정훈이가 코엑스 아쿠아리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자주 가서 지겹다면서 가기 싫어하는 형주를 설득해서 같이 집을 나섰다. 정훈이는 물고기와 공룡을 너무 좋아해서 서울만 오면 아쿠아리움이나 공룡탐험전에 가자고 한다. 촌에서 올라왔으니 서울 구경은 해야할 것이고, 놀이동산보다는 덜 피곤할 것 같아서 열 번도 넘게 가 본 코엑스 아쿠아리움이지만 다시 가기로 했다. 코엑스에서 하는 밀랍인형 전시회에서 애들 사진을 찍어 주고 아쿠아리움에서 신나게 놀게 했다. 두 아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귀여운 놈들.

  남편이 공기 좋지 않은 곳이라고 내 걱정을 했지만 간단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4월 30일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남편이 애들을 여수에 데려다 주러 갔다. 내일 아빠가 여수에 가시면 교대하고 다시 올라 올 것이다.

 

  엄마 친구이신 형0이모께서 항암하고 입맛 없으면 죽 쑤어 먹으라고 손으로 다져진 유기농 소고기를 여러 팩 사주셨었다. 아직 냉장고에 몇 개 남아 있었다. 유미나 나나 요리에는 소질이 없기 때문에 십 분이 넘게 무얼 해 먹을까 고민하다가 김치볶음밥에 넣어서 볶아 먹기로 했다. 제법 괜찮게 요리가 되어서 유미 부부와 나는 맛있게 먹었다.

 

  유미가 미국에 있었을 때 치유의 성령세미나 받았던 얘기를 해 주었다. 안수를 받고서 아주 따뜻하고 편안하고 기쁜 느낌이었단다. 그래서 신부님께 너무 좋았다고 말씀드렸더니 웃지도 않고서 "제가 한 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만약 그 신부님이 나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했다면 그 한 번의 기분만으로 영원히 사랑에 빠질 것 같은 감정이 들었었다고 한다.

 

  동생은 미국에서 연구원 생활 하느라고 결혼을 못할까 봐 걱정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했단다. 동생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잘난 것 다 필요 없고 그저 자기를 끝까지 사랑해주고 위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우리나라로 돌아온 후에 정말로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그다지 내세울 만한 건 없으나 자기만을 끝까지 지켜주겠다는 사람을 만났고, 하느님이 주신 짝이라 굳게 믿고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감사하게 산다고 했다.

 

  동생이 친구 얘기도 해 주었다. 친구는 욕심이 많아서 신랑감 조건으로 수십 가지의 항목을 수첩에 적어 놓고 그런 사람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단다. 결국은 그 조건들을 다 충족하는 짝을 만났다고 한다. 살다 보니 맘에 안 드는 점이 있어서 결혼 전에 적어 두었던 조건을 다시 보니 딱 그 점이 기도항목에서 빠져있었다고 한다.

 

  유미랑 나는 키기덕 대고 웃었다.

  "맞아. 맞아. 하느님은 콕 집어서 부탁한 것만 들어주셔.엉터리야. 엉터리. 그러니까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한다고, 니도 신랑감 조건으로 좀 더 많이 부탁해보지 그랬냐?"

  "글쎄 말이야. 가끔은 더 바래볼 껄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

 

  일요일만 되면 밀린 잠만 자려고 하는 유미를 달래서 아울렛에 갔다. 어버이날 선물로 엄마 티셔츠와 잠바를 사고 남동생 남방도 하나 샀다.

 

미사 갈 시간이 되어서 쇼핑을 다 못하고 성당에 갔다.

오늘 강론은 환경운동하시는 신부님께서 해 주셨다. 환경의 중요성을 아주 재밌게 말씀해주셨다. 환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일이다.

미사가 끝나고 유미는 후원회원 신청서를 내고, 나는 아빠가 우리 집에 십자고상 하나도 없다고 나무라셨던 것이 생각나서 십자고상을 사기로 했다. 환경강론 해주신 신부님께서 사무실로 오셔서 몇 가지 물건들에 축성을 해 주시면서 "아니, 본당신부님 만나기가 어려운가? 왜 나한테 하루 종일 축성해 달라고 하지?"라고 하셨다.

'그럼, 본당 신부님이 저녁미사 뿐만 아니라 아침에도 미사 끝나고도 안 나와 계셨단 말인가? 진짜 어디 아프신가?'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또 00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했다.

 

  어버이날 기념으로 부모님을 위해서 미사를 신청하기로 했다. 일흔이 되어서도 두 분은 가끔 다투신다.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 전에 대전 동생이 왔을 때 우연히 친정집 책장에서 편지 한 묶음을 발견했었다. 내가 여섯 살이고 아빠가 일본에 계실 때 엄마가 아빠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다. 모윤숙의 '렌의 애가'가 무색할 만큼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문학적 향기가 물씬 나게 잘 쓰여 있었다. 동생과 올케와 나는 그 편지들을 읽고 훌륭한 문체에 감탄하고, 지금의 부모님 모습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내용이라 많이 놀랐다. 어쩌다가 그 후로 아웅다웅하시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미사신청 봉투에 두 분의 이름을 쓰고 지향란에 뭐라고 쓸까 유미와 한참을 의논했다. 화목? 화해? 몇 가지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유미가 말했다.

"안 돼, 아주 구체적으로 써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그러더니 '싸우시지 말게'라고 써 넣었다. 사무원 아가씨가 신청봉투를 받아서 읽어 보았다. 내가 유미 옆구리를 툭툭치면서 말했다 "야, 지금 읽는다. 웃겠다. 웃어"

  다행히 그 사무원아가씨는 웃음을 잘 감추었다.

 

 

5월 1일 월요일

 

며칠 전에 대학 친구 태0가 보낸 메일내용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당신의 은총을 믿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당신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확실한 것이 있어야만 믿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하고 믿음이 약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나 위대한 성인들은 모두

평범한 일상 속에서 당신을 믿었고

신앙의 시련 속에서도

당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셨는데

저는

당신을 믿을 만한 깜짝 놀랄 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두려움도 없이 따를 수 있노라고

굳게 고백할 수 있는 확실한 징표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매일 제 곁에서 끊임없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제가 지금까지 억지를 부리고

장님 행세를 해왔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소리 없이 언제나 기적을 일으키고 계신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표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임을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월요일에 가는 성서 못자리에서 신부님이 시작 기도 대신 읽어주시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수업도 못 들을 뻔 했다. 그리고 네 생각도 하고, 요즈음 유난히 내 주위에서 삶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중략) 여수에선 이 친구 저 친구 만나며 밥도 먹고 하느님을 증거해 주면서 왜 서울에 오면 날 안 만나 주는 거니? 치료 받으면 물론 힘들어서 그렇겠지만 치료 받기 전날 만나 맛있는 것 먹고 내가 병원에 따라 갈 수도 있는데...매일 밤 9시에 묵주기도를 통해 너와 많은 이들의 고통에 대해 묵상하고 있단다. 힘을 내렴!!! "

 

  태0와 현0이가 분당으로 오기로 했다. 태0가 해로운 버터 대신 올리브유 넣고 우리밀로 구운 케이크를 만들어 가져왔다. 태0가 인터넷으로 조사해 온 분당의 맛있는 식당들 중에 한 곳을 골라서 밥을 먹었다. 둘 다 내 표정이 너무 밝다고 기뻐해 주었다.

 

 태0가 "너 글 쓰는 거 시간 보내는 좋은 방법 아니냐?"라고 했다.

 나는 속이 상해서 대답했다.

 "야, 그런 거 아니야. 글 쓰는 거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아. 운동도 해야지, 운동을 못하니 살만 찌잖아. 애들도 봐야지, 영어공부도 해야지, 대학원 논문 준비도 해야지. 할 일이 태산이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하느님을 전할 수 있을까 싶어서 서둘러 글 쓰는 거야. 분명히 목적이 있는 글인데 목적이 읽혀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신앙이 없는 사람들한테는 신앙을 갖는 동기가 되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도 더 믿음이 굳어지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 데 대한 갈망이 생기게 되기를 바라고, 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많단 말이야.. 근데 아직까지 열심히 글을 써서 올려도 내 글을 읽고서 신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안 나타났단 말이야."

"다들 남의 이야기로만 느끼는 거지."

"맞아. 그러니까 환자들한테나 공감을 조금 줄 수 있을 뿐일 거야.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의 이야기이지. 실감을 못하겠지 "

"얼마 전에 친구가 15기도라는 책을 주어서 해 보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고통을 자세히 묘사해 놓은 기도문을 읽어도 그 고통이 정말로 마음에 와 닿지 않더라구. 그저 예수님이니까 참을 수 있으셨겠지,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서 기도를 그만 두었어. 예수님 고통도 남의 일이라니까."

"태0야, 여기 성당에서 성령세미나를 하는데 강의라도 들어보지 그러냐?"

"나는 아직 성령세미나라면 무서워서..."

"그래? 하긴 성령의 은사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지.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도 없고. “

 

  태0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신앙생활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언제나 한결 같고 언제나 반듯하고 착한 친구다.

  태0가 성령세미나로 변화된 한 자매 얘기를 해 주었다.

 "내가 아는 한 언니는 성격이 엄청 세서 남편한테도 잔소리를 심하게 하고 아들한테도 나무라기 시작하면 심하게 나무래. 그런데 성령안수를 받을 때 몸이 휘청하더래. 그러면서 자기가 막 잔소리를 심하게 퍼부어댈 때 고통스러워하는 남편과 아들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르더래. 그래서 남편한테도 자기가 그동안 잘못했다고 빌고 아들한테도 무릎 꿇고 "내가 너를 너무 힘들고 아프게 했다. 미안하다"라고 했대. 지금 그 언니는 얼마나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지 몰라."

 

  현0이는 대학교 다닐 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병원에 있을 때도 태0랑 두 번이나 찾아 왔고 오늘도 바쁜 중에 나를 만나러 왔다.. 엄청 큰 학원의 원장인데 큰 학원을 경영하게 되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가난한 동네에서 천막치고 학생들 가르쳤던 일, 무료로 학생들 점심 해 먹인 일, 손수 전단지 돌린 일 등등. 인간시대나 성공시대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였다.

  "너는 불쌍한 애들 가르치고 먹인 공 때문에 지금 잘된 거야.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냐? 다 계산에 바쁘지. "

 

  나는 친구들과 오래 수다를 떤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현0아 다음에 니 성공시대 2탄 해 줘야 돼. 태0야 내가 보낸 스팸 메일 읽느라고 고생한다. 운전 조심해."

 

  제자 몇 명이 전화를 했다.

 "선생님, 저희 오늘 시험 끝났어요. 근데 왜 선생님 아직 학교 안 나오세요? "

 "야, 선생님 1년 휴직했어. 니들 졸업할 때가지 못 가"

 나는 애들 가르치던 때가 너무 그리워졌다. 애들이 보고 싶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야 할 텐데.

 

  성체조배를 하러 갔다. 오랫동안 감실 앞에 앉아서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기도도 했다.

"아, 하느님, 제가 뭐라고 저를 사랑한다 하십니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많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부족하고 약하기만 한데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게 해 주시다니, 그저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성체조배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건들건들 거의 춤을 추다시피 걸었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