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나자렛 성가정 -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서

김레지나 2008. 8. 29. 18:55

 

그리스도의 시에 대한 논란을 글 아래 붙입니다.

두 가지 견해를 읽어보시고 판단은 독자들이 알아서 하십시오.

제 생각에는 글자 그대로 책내용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것도

책은 완전히 허구이고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도 다 문제가 있지않나 싶네여.

자구에 매달려 교리에 어긋나는 고집만 하게 되지 않는다면 나름 유익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 그리스도의 시를 성경대하듯 하여, 그 내용에 매여서 다른 묵상들을 배척한다면 그거야말로 부작용이겠지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원제 : Il Poema dell' Uomo-Dio)

이 책은 예수님께서 마리아 발또르따를 통해 2천년전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계시와 환시로 받아 쓰게 한책입니다.

1947년 비오12세 교황의 조언에 따르면,

"해석은 일체 독자가 해야 할것이다" "읽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라고 교황은 덧 붙이셨읍니다.


-이책의 후반부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을 천상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나를 너희들에게 주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너희가 활기를 잃고 시름시름하지 않기 위하여, 너희가 세상이라는 함정과 가시덤불과 뱀이 가득 찬 이 사막에서 고생을 이기고 난 다음 어린양의 혼인잔치, 즉 하느님의 큰 잔치를 위하여 꾸민 옷을 입고, 너희들 안에 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길 속으로 지나가도 손상을 입지 않고 뱀을 밟고 독약을 마셔도 죽지 않게 되기 위하여는 너희에게 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집어라 이 책을 집어라. 그리고 봉하지 말고 읽어라. 그리고 그 때가 가까웠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게 하여라.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더 거룩하기 되게 하여라. 이 책에서 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이 가까이 옴이 이루어지기를 '주 예수여 오소서!' 하고 사랑의 부르짖음으로 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




-주께서 1975년에 몬시놀 옷타비오 미켈리니에게 나타나셔서 쓰게 하신 책인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에서도 이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제물이 된 영혼인 마리아 발또르타로 하여금 내 말을 받아쓰게 하여 놀라운 저서가 되도록 하였다. 이 작품의 저자는 물론 나 예수이다. 그러나 네가 알다시피 사탄이 길길이 뛰며 분통을 터뜨렸던 것이다. 단지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묵상한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엄청난 선익을 얻게 되련마는! 그만큼 이 책은 진실하고 견실한 영적 양식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워진 교회 안에서라야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 되어 있는 책이다. 현재는 사람들이 숱하게 발간되는 거만한 신학자들의 쓰레기 같은 책이나 잡지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추천의 말씀 >


"이 글에는 성서에 반대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저서는 성서에 대한 훌륭한 보충이어서 성서의 뜻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주님의 말씀에도 예수님의 정신에 어떤 모양으로든 어긋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 예부성성 장관 알퐁소 까린치 대주교


"나는 (타자기로 찍은 원고로) 마리아 발또르따가 쓴 책을 상당히 많이 읽었다..... 성서 주해가로서 내게 관한 한 내가 검사한 (책의) 부분에서 아무 오류도 찾아 내지 못하였다."

- 교황직속 성서연구소 소장, 검사성성 고문, 예수회 아고스띠노 베이 추기경


"나는 마리아 발또르따의 글에 있는 마리아학이 내게는 하나의 실제적인 발견이었다고 순수하게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어떤 다른 글도, 내가 읽고 연구한 모든 글의 총체조차도 하느님의 걸작이신 마리아에 대하여 소박함과 동시에 숭고하고, 이처럼 분명하고, 이처럼 생생하며, 이처럼 완전하고, 이처럼 빛나고 또 이처럼 매혹적인 인상을 내게 줄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하여 쓴 다른 그 많은 책에서 내가 읽은 것은 창백한 얼굴과 같이 생각됩니다."

- 검사성성 고문, 교황직속 신학대학 '마리아늄' 교수, 저명한 마리아학자 가브리엘 M. 로스끼니 신부


"나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열 권을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로 읽었다. 나는 이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한다. 나는 70세 노인이다. 그런데 내 일생동안 읽은 책 중에서 이 책이 내 영적 생활에 가장 많은 이익을 준 책이다."

- 국제 '푸른 군대' 공동 창시자 죤 하퍼트


"성하께서 밀라노의 대주교이실 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중에서 하나를 읽으셨는데, 그 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를 내게 말씀하시면서 저서 전질을 교구 신학교 도서관에 비치하라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 교황 바오로 6세 비서 바스꽐레 마르끼 주교


"이 책은 수많은 영성 서적 중에서 내가 발견한 가장 좋은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은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된 많은 사람에게 훌륭한 영신의 양식을 제공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톨릭 신앙을 다시 발견할 수 있게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영적 책임을 맡은 여러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였다."

- 카메룬 콩삼바의 알베르 동모 주교


"저자는 초자연적인 능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이처럼 방대한 양의 자료를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 라테란의 교황직속 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검사성성 고문 우고 라딴지 주교


"나는 1979년에 처음으로 마르아 발또르따의 저서와 접촉을 하였다.... 나는 이 책이 엄청나게 큰 감명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 이 방대한 저서를 총명한 정신으로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의 저자가 하느님의 성령임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 수바 피지의 전직 대주교이며, 롱 아일랜드 프로비덴스의 죠지 H. 피어스 S.m. 주교



"내가 출판한 모든 책 중에서 마리아 발또르따의 저서가 내 생활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고, 내게 가장 큰 만족을 주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이 내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회개를 말하고, 하느님과 교회로 돌아온 것을 말하고, 혹은 덜 열심이던 그들이 이제부터는 완덕의 길로 예수님을 바짝 따르기로 약속한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 일본 돈 보스꼬사 사장 페데리꼬 바르바로 신부


"나는 구약과 신약성서에 있지 않은 적어도 예닐곱 군데 도시의 이름을 마리아 발또르따의 저서에서 발견하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도시명들은 몇몇 전문가들에게만, 그것도 성서가 아닌 원전(原典)을 통하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즉 그녀가 그 도시명들을 알 수 있겠는가?"

- 예루살렘 프랑스 성서 및 고고학 학교 드레퓌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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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에 간다


  나는 성녀 엘리사벳의 집에 가려고 길 떠나는 광경을 본다. 요셉은 회색 나귀 두 마리를 끌고 마리아를 데리러 왔다. 한 마리는 그가 탈 것이고, 또 한 마리는 마리아가 탈 것이다.

두 짐승 중의-한 마리에는-이상한 장치를 덧붙인 보통 안장이 얹혀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짐을 얹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그것은 일종의 짐받이로 요셉이 마리아에게 비 맞지 않게 그 안에 옷을 넣으라고 가져온 작은 나무 체를, 그 위에 요새 말로 말하자면 트렁크를 올려놓는다. 나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그의 용의주도한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을 깨닫는다. 마리아는 전에 준비하였던 보따리에 쌌던 모든 것을 꺼내서 그 궤 속에 챙겨 넣는다.

  그들은 집의 대문을 잠그고 길을 떠난다. 여명이 겨우 동쪽을 붉게 물들이는 것으로 보아 새벽이다.

  나자렛은 아직 자고 있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나는 두 길손은 서로서로 쐐기처럼 들어박혀서 매애 매애 하고 울며 종종걸음을 치는 양들을 앞세우고 가는 목동 한 사람을 만날 뿐이다. 어린 양들도 우는데, 그 날카로운 작은 목소리로 다른 놈들보다 더 매애 매애 하고 운다. 어린 양들은 아직 어미젖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어미들은 풀밭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면서 더 큰 울음소리로 어린 양들에게 재게 걸으라고 재촉한다.

  마리아는 내려다보고 양떼가 지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멈추어 선 다음 미소를 짓고, 안장에서 몸을 숙여 자기가 탄 나귀를 스치며 지나가는 온순한 짐승들을 쓰다듬어 준다. 갓난 어린 양을 안은 목동이 다시 인사를 하려고 발을 멈추자 마리아는 죽어라 하고 매애 매애 하고 우는 어린 양의 볼그레한 작은 주둥이를 쓰다듬어 주며 웃는다. 마리아는 말한다. “어미를 찾는군요. 엄마가 저기 온다. 엄마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요것아.”과연 어미양은 목동에게 몸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제 새끼의 주둥이를 핥아준다.

  양떼는 나뭇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내고 서두르는 그놈들의 모든 굽으로 일으키는 먼지와 길의 흙에 수 놓은 것과 같은 수많은 발자국을 뒤에 남기면서 지나간다.

  요셉과 마리아는 다시 길을 떠난다. 요셉은 겉옷을 입고 있다. 마리아는 아침이 매우 싸늘하기 때문에 줄무늬가 있는 쇼올로 몸을 감싸고 있다.

  그들은 이제 들판에 들어서서 나란히 나아간다.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요셉은 그의 일을 생각하고, 마리아는 그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의 생각에 잠겨 있기 때문에 그 생각에 미소를 보내고 주위에 있는 물건들을 보고 미소짓는다. 어쩌다가 요셉을 쳐다보고는 얼굴에 약간 슬픈 빛이 감돈다. 그러다가 말수가 적고 마리아에게 몸이 편하냐고,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느냐 묻기 위해서나 입을 여는 주의 깊은 남편을 쳐다볼 때에도 미소가 다시 떠오른다.

  이제는 행길에 다른 사람들도 지나다닌다. 특히 어떤 마을 근처나 교차점에서는 더 그렇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방울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종종걸음을 치는 나귀를 몰아가며, 빵과 올리브를 좀 먹고 작은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마시기 위하여 다만 한 번만 걸음을 멈춘다. 그들은 시커먼 구름에서 쏟아지는 심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하여 두 번째로 걸음을 멈춰야 한다.

  그들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서 큰 비는 맞지 않게 보호해 주는 야산의 비 피할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요셉은 물이 적시지 않고 흘러내리는 물이 스미지 않는 양모로 짠 그의 겉옷을 마리아에게 기필코 입게 하려고 한다.

  마리아는 남편의 간절한 강요에 양보할 수밖에 없다. 요셉은 자기의 처지에 대하여 마리아를 안심시키려고 안장에 있던 작은 회색 담요를 머리와 어깨에 씌운다. 그 담요는 아마 나귀를 덮어 주는 담요인 것 같다. 이제 마리아는 얼굴을 둘러싼 두건을 쓰고, 몸 전체를 덮는 목 언저리에서 감겨진 밤색 겉옷을 입고 있어 꼭 어린 수사와 같다.

  소나기는 그쳤지만, 그 대신 귀찮은 가는 비가 온다. 두 사람은 진흙투성이가 된 길을 다시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봄이라. 잠시 후에는 해가 나서 길이 더 가기 쉽게 되기 시작한다. 두 나귀는 더 경쾌하게 길을 달린다.

 

  -환상이 여기서 그쳤기 때문에 나는 다른 것은 보지 못하였다.



30. 예루살렘에서 즈가리야의 집까지

  여기는 예루살렘이다. 이제는 그 거리와 성문들을 보고 잘 알아볼 수 있다.

  두 부부는 우선 성전 쪽으로 향한다. 나는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던 날 요셉이 나귀를 맡겼던 마구간을 알아본다. 오늘도 그는 두 나귀를 손질한 다음 그곳에 맡기고 마리아와 함께 주께 예배하러 간다.

  그런 다음 나와서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어떤 집으로 가는데, 아는 사람의 집인 것 같다. 그들은 그 집에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요셉이 한 작은 노인과 같이 돌아올 때까지 쉰다. “이분은 당신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오. 당신이 친척집에 이르기까지 혼자 갈 길은 얼마 안 될 거요. 이 노인을 믿으시오. 내가 잘 아는 분이오.”

  그들은 나귀를 다시 타고, 요셉은 성문(그들이 들어온 성문과는 다른 성문이다)까지 마리아를 배웅한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마리아는 작은 노인과 같이 간다. 노인은 요셉이 말수가 적었던 것과는 반대로 말을 많이 하고, 별별 일에 다 관심을 보이는데, 마리아는 참을성 있게 대답한다.

  지금은 안장 앞쪽에 요셉의 나귀가 실었던 작은 궤가 놓여 있고 마리아는 겉옷도 입지 않았다. 쇼올도 두르지 않고 개켜서 궤 위에 놓았다. 마리아는 파란 옷을 입고 햇볕을 가려 주는 흰 베일을 쓰고 있는데 아주 아름답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항상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마리아가 그에게 들리게 하려면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 것을 보면 작은 노인은 가는 귀가 먹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 끝났다. 이제는 그의 질문과 소식의 보고도 동이 나서 이제 노인은 길을 잘 아는 짐승이 인도하도록 맡겨두고 안장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마리아는 그 일시적인 중단을 이용하여 자기 생각을 가다듬고 기도를 드린다. 한 팔을 가슴에 얹고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기도임에 틀림없다. 그의 얼굴은 영혼의 감동의 노력으로 인하여 빛과 무상의 기쁨을 나타낸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는 환상이 중단된 지금, 나는 어제와 같이 내 곁에 내적인 환상으로 볼 수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아 있다. 어떻게나 분명히 볼 수 있던지 어머니의 초상을 묘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약간 포동포동하지만 기분 좋게 부드러운 엷은 분홍빛 뺨, 선명한 붉은 색의 작은 입, 짙은 금빛 속눈썹 밑에 있는 다정스럽게 빛나는 파란 눈.

  나는 머리 꼭대기에서 갈라진 머리가 어떻게 기분 좋게 세 개의 웨이브를 이루면서 양쪽으로 내려와 볼그레한 작은 귀를 반쯤 덮기까지 하고 그 엷고 빛나는 금빛을 보이며 머리를 덮은 베일 뒤로 사라지는지 말할 수 있다. (과연 나는 성모님이 천국에나 있을 것 같은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으시고 겉옷을 머리에까지 쓰고 계신 것을 보는데, 그 겉옷은 베일처럼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옷과 같은 감으로 만든 탁탁한 것이었다).

  나는 옷이 목에서는 끈이 미끄러져 움직이는 홈으로 죄어지는데, 그 끈의 두 끝은 목이 시작되는 곳 앞 쪽에서 고리로 끝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어떻게 옷이 허리에 더 굵은 끈으로 매져 있으며, 그 끈도 역시 흰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술 두 개가 달려 있으며 옆구리를 따라 내려뜨려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목과 허리에 매진 옷의 가슴 부위에는 부드럽고 둥글게 한 주름 일곱 개가 있는데, 이것이 그분의 지극히 정숙한 옷의 유일한 장식이라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

  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풍겨지는 순결의 인상을 말할 수 있고, 그분을 천사와 같은 여인으로 만드는 그분의 지극히 품위 있고 대단히 균형 잡힌 형태에서 풍겨지는 순결의 인상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모님을 쳐다보면 볼수록 어느 정도까지 사람들이 그분을 괴롭혔는지를 생각하며 고통을 느끼고, 어떻게 사람들이 그분의 육체적인 모습으로도 그렇게도 다정스럽고 친절하고 품위 있는 그분을 동정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나는 그분을 쳐다보며, 그분을 향하여 지르는 골고타의 아우성, 그분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분을 향하여 내뱉는 모든 조롱과 야유, 모든 저주를 듣는다. 나는 지금은 성모님의 아름답고 불안이 없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분의 지금 모습도 예수님의 임종의 고통 때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예루살렘의 집에서 나타내던 슬픔의 시간에 가지셨던 비참한 얼굴의 기억을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성모 마리아를 쓰다듬어 드리고 그렇게도 품위 있게 볼그레한 뺨에 입 맞추어 드리며 성모님과 내 안에 남아 있는 그 눈물들의 기억을 내 입맞춤으로써 없애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성모 마리아를 아주 가까이에 모시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평화를 주는지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성모님을 보면서 죽는 것이 살아 있을 때의 가장 즐거운 시간만큼이나, 그보다도 더 즐거우리라고 생각한다. 나 혼자만이 이렇게 그분을 온전히 보지 못한 요 근래에 나는 엄마가 없는 것처럼 그분이 안 계신 것이 괴로웠다. 이제는 지난 12월과 1월 초에 나를 떠나지 않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수난와 가슴�기는 비통을 보는 것이 내 지복을 흐리게 하는 고통의 베일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수난 동안에 예수님이 고통당하시는 것을 본 2월 11일 저녁부터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당하였는지를 말하고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보고서 나는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내가 지금 죽든지 100년 후에 죽든지 그 환상은 그 강함과 그 영향을 그대로 보존할 것이다. 그전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 고통들을 살고 있다.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상본을 한 번 흘낏 보기만 해도 그날 저녁 내가 당한 고통을 다시 당할 수 있고, 그 소름끼치는 고문을 느낄 수 있으며, 그분의 비탄에 잠긴 고통의 고뇌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며, 그분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그분의 추억이 내 마음을 죄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말씀을 시작하신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문다.



31. “절대로 기도의 보호를 버리지 말아라”

  성모 마리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엾은 내 딸아, 네가 매우 피로해 있기 때문에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항상 기도를 제일 중요시하던 요셉과 나의 끊임없는 습관에 너와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주의를 끌 뿐이다. 무미건조함, 서두름, 근심, 일 따위도 기도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들이었고, 오히려 기도를 도왔다. 기도는 항상 우리 일의 여왕이었고, 우리의 위안이요, 우리의 빛이요, 우리의 바람이었다. 슬플 때에는 기도가 위안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에도 기도가 노래가 되곤 하였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충실한 벗이었다. 기도는 우리를 땅에서,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떼어 놓아 주고, 우리를 천국의 높은 곳, 고향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내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어서 더없이 거룩하신 분께 예배하기 위하여는 내 가슴을 보기만 하면 되던 나뿐 아니라, 요셉도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 결합하여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런 다음 그분의 포옹을 받음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녹아버리는 우리 존재 전체의 참다운 예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아라. 영원한 분을 배고 있던 나도 성전에 경건하게 자주 가는 것이 면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무리 높은 성덕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낮추는 것을 면제하여 주지는 못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에 대한 끊임없는 환희의 노래로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약하고, 보잘 것 없고, 결점투성이가 아니냐? 주님의 거룩하심에 구원을 빌어라.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하고 너희들의 불행을 구원해 주십사고 복되신 그 거룩하신 분을 불러라. 하느님께서 오셔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너희에게 옮아가게 하실 것이다. 너희가 거룩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공로가 많으냐? 역시 주님의 거룩하심에 구원을 빌어라. 그 무한한 거룩하심이 너희의 거룩함을 점점 더 자라게 하실 것이다. 인간의 약함보다 우월한 천사들도 그들의 “거룩하시다”를 노래하기를 잠시도 그치지 않는데, 우리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기원할 때마다 그들의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이 더해진다. 천사들을 본받아라.

  절대로 기도의 보호를 버리지 말아라. 기도에 와서 부딪치면 사탄의 무기와 세상의 악의, 육체의 욕망과 정신의 오만이 무디어진다. 하늘을 열어 거기에서 은총과 축복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오게 하는 그 무기들을 절대로 버리지 말아라.

  세상은 하느님의 벌을 끌어들이는 잘못을 깨끗이 씻기 위하여 기도의 목욕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므로,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태만을 보충하기 위하여 많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산 기도를 증가시켜 은총을 얻는 데 필요한 분량이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한다. 그들의 기도가 사랑과 희생에서 우러나올 때 살아 있는 기도가 될 것이다.


  내 딸아, 그리고 너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 내 고통과 내 예수의 고통과 결합한 고통은 훌륭한 것이고 하느님 뜻에 맞으며 공로가 되기 때문이다. 네 동정하는 사랑이 내게는 대단히 소중하다. 내게 입맞춤을 주려느냐? 내 아들의 상처에 입맞추어라. 그 상처에 네 사랑의 향유를 발라라. 나는 내 정신으로 채찍과 가시의 아픔, 못과 십자가의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내 예수에게 주는 모든 사랑의 어루만짐도 느낀다. 그것은 그만큼의 입맞춤을 내게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오너라, 나는 하늘의 모후이다.

그리고 언제나 어머니이다‥‥.”

 

  나는 행복하다!





 60. 이집트에서의 성가정

  <성가정에 대한 기분 좋은 환상>: 여기는 에집트이다. 사막과 피라밋이 보이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주 하얀 작은 단층집이 하나 보인다. 매우 가난한 사람들의 초라한 집이다. 벽들은 겨우 초벽을 한 위에 회칠 한번만 하였다. 이 작은 집에는 둘 밖에 없는 방으로 들어가는 문 둘이 나란히 나 있다. 나는 지금 당장은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집은 모래 섞인 작은 땅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고 갈대를 땅에 박은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는데, 이것은 도둑을 막기에는 약한 방벽이다.

  그 울타리는 어떤 떠돌아다니는 개나 도둑고양이나 막는 데 소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보아하니 재물의 그림자도 없을 것 같은 곳에서 누가 무엇을 훔쳐갈 생각을 하겠는가?

  갈대 울타리에는 메덩굴 같아 보이는 덩굴풀을 올려서 더 두꺼워 보이고 덜 초라해 보이게 하였다. 한 쪽에만 꽃이 핀 쟈스민 소관목 한 그루와 아주 흔해빠진 장미나무를 여러 그루 모아 심은 것이 있다. 땅은 비록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작은 뜰을 만들려고 참을성 있게 가꾸었다. 뜰 한가운데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는 오래 된 큰 나무 밑에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작은 화단에는 매우 빈약한 채소들이 보인다. 그 큰나무는 햇볕이 내리쬐는 땅과 작은 집에 그늘을 좀 만들어 준다. 이 나무에는 흰 빛깔과 검은 빛깔이 섞인 작은 염소 한 마리가 매여 있는데, 그놈은 땅 위에 던져 준 나뭇가지 몇 개의 잎들을 뜯어먹고 새김질한다.

  그리고 거기 땅에 편 자리에 예수 아기가 있다. 두 살, 기껏해야 두 살반 쯤 되어 보인다. 아기는 양이나 말같이 깎은 나무조각과 그의 금발머리보다는 덜 굽슬거리는 리본같은 가벼운 나무오라기를 가지고 논다. 그의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 나무 목걸이를 그 짐승들의 목에 걸려고 애쓴다.

  아기는 즐거워하고 미소를 짓고 있다. 대단히 아름답다. 아주 숱이 많은 컬이 된 금발을 가진 작은 머리에, 살갗은 희고 약간 불그레하며, 짙은 파란색 눈은 생기가 있고 빛난다. 표정은 자연히 다르지만 나는 내 예수의 눈 빛깔을 알아본다. 매우 아름다운 어두운 두 개의 청옥과 같다. 아기는 긴 흰 빛깔 옷을 입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속옷이 되는 것이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온다. 발에는 지금은 아무것도 신지 않았다. 조그마한 샌들이 자리 위에 있는데, 역시 아기의 장난감이 된다. 샌들을 짐승들의 목에 메우니, 그놈들은 마치 조그마한 짐수레처럼 가죽끈으로 끈다. 매우 단순한 샌들이다. 바닥 가죽끈 두 개로 된 것인데, 그 가죽끈 두 개가 하나는 코에 달려있고, 하나는 뒤축에 달려 있다. 코에 달려 있는 가죽끈은 얼마만큼 와서는 둘로 갈라진다. 그래서 한쪽 끈은 뒤축에서 오는 가죽끈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 발목에 고리처럼 둘려 있는 다른 가닥에 가서 걸리게 되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성모님이 역시 나무 그늘에 있다. 마리아는 촌스러운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며 아기를 살핀다. 나는 그의 가냘픈 흰 손이 날실 사이로 북을 던지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며, 베틀신을 움직이는 샌들을 신은 발을 본다. 마리아는 접시꽃 빛깔 같은 분흥색을 띤 보라빛 웃옷을 입고 있다.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금발을 앞가리마를 타서 머리 위에 갈라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머리를 단순하게 땋아서 목덜미 위로 기분 좋게 늘어뜨렸다. 옷소매는 길고 좁은 편이다. 그의 아름다움과 그의 얼굴의 지극히 부드러운 표정 외에 다른 장식은 없다. 그의 살갗, 머리와 눈의 빛깔, 얼굴 모양, 모두가 내가 늘 보는 마리아와 같다. 여기서는 매우 젊어 보인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인다. 얼마 후 마리아는 일어나 아기에게로 가서 몸을 구부리고 샌들을 다시 신기고 정성스럽게 끈을 맨다. 그런 다음 아기를 쓰다듬어 주고. 머리와 눈에 입을 맞춘다. 아기가 떠듬거리며 말을 하니 대답을 하는데.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런 다음 베틀로 돌아가 짜진 옷감과 날실 위에 린네르 천을 펴놓고, 자기가 앉아 있던 걸상을 가지고 집으로 간다. 아기는 엄마를 눈으로 지켜보며, 혼자 남겨두어도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

  일이 끝나고 저녁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해가 나무 없는 모래 위로 내려오고, 먼 피라밋 뒤로는 온 하늘이 꼭 불붙은 것같이 보인다.

  마리아가 돌아와서 예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다. 아기는 군소리 없이 복종한다. 엄마가 장난감과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들여가는 동안, 아기는 그 작은 다리로 종종걸음을 쳐서 염소 있는 데로 뛰어 가 염소 목에 팔을 얹는다. 염소는 매애하고 울면서 주둥이를 예수의 어깨에 비빈다.

  마리아가 돌아온다. 지금은 머리에 긴 베일을 썼고 손에는 항아리를 들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의 귀여운 손을 잡고, 둘이 작은 집 주위를 돌아 집의 다른 편으로 간다.

  나는 그 우아한 광경을 감상하며 따라간다. 자기 걸음을 아기의 걸음에 맞추는 성모님과 그 곁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아기. 나는 볼그레한 발뒤꿈치가 들렸다가 아이들의 발걸음의 특별한 맵시로 오솔길의 모래로 내려지는 것을 본다. 자세히 보니 아기의 작은 옷이 발까지 내려오지 않고, 장딴지 중단까지만 내려온다. 그 옷은 대단히 깨끗하고 간단하며, 허리는 역시 흰빛인 끈으로 졸라맸다.

  나는 집 앞쪽 울타리에는 촌스러운 사립짝이 달려 있는 것을 본다. 마리아는 그 사립짝을 열고 거리로 나간다. 그것은 어떤 도시나 어떤 보잘것없는 마을 끝에 있는 초라한 거리로, 소도시와 들판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마리아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들판 쪽을 보지 않고 마을의 중심 쪽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몇 십 미터 윗 쪽에 있는 못인지 우물인지가 있는 곳을 향하여 간다. 그 위로는 종려나무들이 둥그렇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곳에 는 땅에 푸르른 풀이 깔려 있다.

  여기서 어떤 남자가 거리로 해서 앞으로 오는 것이 보이는데, 그리 크지는 않지만 튼튼하게 생겼다. 나는 요셉을 알아본다. 그는 빙그레 웃고 있다. 그는 내가 천국에 관한 환상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젊어 보인다. 나이는 많아야 마흔쯤 되어 보인다. 수염과 머리털은 숱이 많고 검으며, 살갗은 꽤 햇볕에 그을었고, 눈은 짙은 빛깔이다. 성실하고 기분 좋은 얼굴,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이다. 예수와 마리아를 보고 그는 걸음을 재게 움직인다. 그는 왼쪽 어깨에 톱 같은 것과 대패 같은 것을 메고 있고, 손에는 그가 일하는데 쓰는 다른 연장들을 들고 있는데. 지금 연장들과는 다르지만, 그렇게 많이 틀리지 않는다.

  그는 개암 색과 밤색 중간색의 옷을 입고 있는데, 대단히 길지는 않고 -발목 조금 위까지 내려온다- 소매는 팔꿈치까지 온다. 허리에는 아마가죽으로 만든 것 같은 허리띠를 맸다. 진짜 일꾼 옷이다. 발에는 발목에서 서로 엇갈리는 끈이 달린 샌들을 신었다.

  마리아가 미소를 짓고, 아기는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잡히지 않는 팔을 내민다. 세 사람이 한데 모이자, 요셉은 몸을 굽혀 아기에게 과일 한 개를 주는데, 모양과 빛깔이 사과 같다. 그런 다음 팔을 내미니, 아기는 엄마 손을 놓고 요셉의 팔에 안겨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요셉의 어깨 오목한 곳으로 숙인다. 요셉은 아기에게 입을 맞추고 아기의 입맞춤을 받는다. 우아한 애정이 넘쳐흐르는 몸짓이다.

  나는 마리아가 서둘러 요셉에게서 연장을 받아 요셉이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아기를 안아 줄 수 있게 하였다는 말을 잊을 뻔했다.

  그런 다음, 예수의 키에 맞추느라고 쭈그리고 앉았던 요셉이 다시 일어나서 왼손으로는 다시 연장을 들고 오른 팔로는 어린 예수를 그의 튼튼한 가슴에 껴안는다. 마리아가 손잡이 달린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고 샘으로 가는 동안 요셉은 집 쪽으로 간다.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요셉은 아기를 땅에 내려놓고, 마리아의 베틀을 들어 안으로 들여가고, 그 다음에는 염소젖을 짠다. 예수는 이 작업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요셉이 집 한편에 지어놓은 작은 헛간에 염소를 가두는 것을 바라본다.

  저녁 어두움이 내리깔리기 시작한다. 나는 모래 위에서 자줏빛을 띠는 황혼의 붉은 빛을 살펴본다. 모래 위에서는 더위로 인하여 공기가 흔들리는 것 같다. 피라밋은 더 컴컴한 빛으로 보인다.

  요셉은 집안의 어떤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 방은 작업장도 되고 부엌과 식당도 되는 것 같다. 다른 방은 쉬는 방으로 생각되지만 나는 그 방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방바닥 높이에 불을 피운 아궁이가 있고, 역시 이 방에 목수의 작업대와 같은 탁자와 등 없는 걸상들과, 그릇 몇 개와 기름등잔 둘이 얹혀 있는 선반들이 있다. 한 구석에는 마리아의 베틀이 있다. 정말 질서 정연하고 대단히 깨끗하다. 대단히 가난하지만 매우 깨끗한 집이다.

  내가 한 가지 주의한 것은 이런 것이다. 예수의 인간 생활과 관계가 있는 모든 환상에서 내가 눈여겨본 것은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요한이 항상 정돈이 잘 되고 깨끗한 옷을 입었고 꾸밈이 없지만 머리를 잘 손질하고 수수한 옷에 단순하지만 깨끗한 머리쓰개를 써서 그들의 품위가 뚜렷하다는 사실이다.

  밤이 빨리 어두워지기 때문에 마리아는 손잡이 달린 항아리를 가지고 돌아와 문을 닫는다. 방은 요셉이 불을 켜서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등불로 밝혀진다. 요셉은 마리아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자질구레한 일을 더 좀 하려고 작업대 위로 몸을 굽힌다. 불이 방안을 밝힌다. 예수는 작업대에 손을 얹고 머리를 쳐들고 요셉이 하는 일을 지켜본다.

  그런 다음 그들은 기도를 드리고 나서 식탁에 둘러앉는다. 그들은 물론 십자 성호를 긋지 않지만 기도는 한다. 요셉이 기도를 드리고, 마리아가 응답을 한다. 그러나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시편의 어떤 구절인 것 같은데,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말로 왼다.

  그런 다음 앉는다. 지금은 램프가 식탁 위에 놓여 있다. 마리아는 예수를 안고 염소젖을 먹인다. 마리아는 둥그스름한 빵에서 잘라 낸 빵조각들을 양젖에 담근다. 빵은 껍질도 검고 속도 검다. 아마 호밀이나 보리로 만든 빵인 것 같다. 그것은 밀기울이 많이 들어간 갈색 빵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빵과 치즈를 동시에 먹는다. 치즈 한조각과 빵을 많이 먹는다. 그런 다음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 앞에 있는 조그마한 걸상에 앉힌다. 마리아는 익힌 야채를 가져와서-그 야채는 우리도 보통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맹물에 익혀서 양념을 한 것 같다-요셉이 먹은 다음 자기도 먹는다. 예수는 조용히 그가 가진 사과를 먹으면서 작은 흰 이를 드러내면서 웃고 있다. 식사는 올리브인지 대추야자 열매인지 잘 모를 것으로 끝난다. 올리브 치고는 빛깔이 너무 엷고, 대추야자 열매라면 너무 단단하다. 포도주는 도무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이다.

그러나 이 방 안에서 풍기는 평화는 대단히 고귀하다. 왕의 호화로운 저택을 보아도 이만큼 매력 있는 것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화목한 집안인가!


  오늘 밤 예수님은 말씀을 안하시고, 이 광경을 설명해 주시지 않는다. 내게 보여 주시는 환상으로 가르치실 뿐이다. 이 때문에 항상 한결 같이 찬미 받으시기를 바란다.



 61. “이 집에서는 질서가 존중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너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교훈이 네가 보는 것들을 통하여 주어진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에, 특히 특별히 비통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가정들에게 추천하는 겸손과 체념과 완전한 화합의 교훈이다.

너는 초라한 집을 보았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외국에 있는 초라한 집이라는 것이다.

  아주 조그만 고생도 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편한 생활, 순탄하고 행복한 생활을 갈망하는 ‘그저 쓸 만한’신자들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기도와 영성체를 영혼들의 절실한 필요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필요를 위하여만 하기 때문이다(사실, 기도할 때에 이기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 하느님인 나를 그들의 아들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는 조그마한 만족조차 누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고향(나자렛)에서, 또 그들의 조국(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이 알려져 있고, 적어도 ‘그들의’ 작은 집 한 채는 있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문제에 주택 문제까지 겹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조국에서는 몹시 가난해도 자그마한 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일거리를 얻고 생활문제에 대비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나 때문에 위험을 당하고 겨우 살아남은 두 사람으로서, 풍토도 다르고, 갈릴래아의 기분 좋은 들판과 비교하면 몹시 쓸쓸한 나라에서, 그들을 알지 못하고 말과 풍속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피난민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흔히들 가지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작은 집에 있는 저 편안하고 애지중지하는 가구들과 저 보잘 것 없으면서도 필요한 많은 물건을 가지지 못했다. 그것들이 거기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었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아무것도 없고 보니, 마치 부자집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사치품과 같이 매우 아름다운 것 같이 생각된다. 그들은 고향과 집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그들의 생각은 그곳에 남겨두고 온 저 보잘것없는 물건들, 이제는 아마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을 채소밭으로, 포도나무로, 무화과나무와 다른 유익한 초목들에게로 달려간다. 그들은 매일 먹을 양식과 옷과 불, 그리고 자기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줄 수 없는 어린 나를 위하여 마련해야 할 필요에 처해 있다. 게다가 마음속에 고통이 많이 있다. 향수도 그렇고 내일에 대한 걱정도 그렇고, 사람들의 불신임도 그렇다. 사람들은 특히 처음 얼마 동안은 까다로워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일을 시켜달라는 것을 쉽게 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도 보았지만, 이 집에는 평온과 미소와 화합이 감돌고, 일치단결하여 이 집을 더 아름답게 하려 애쓰고, 보잘것없는 채소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떠나온 집과 같게 하고, 한층 더 편안하게 하려고 힘쓴다.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다. 적의를 품은 땅이 거룩한 나에게, 하느님에게서 온 나에게 덜 비참한 땅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수많은 보살핌으로 나타나는 믿는 사람과 부모로서의 사랑이다. 가외로 많은 시간 일을 해야 하는 염소와 나무 조각 남은 것을 가지고 파서 만든 작은 장난감들을 보아라. 그리고 자기들은 한 입거리 음식까지 희생해 가면서 나만을 위하여 사오는 과일들을 보아라.

  이 세상의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하느님께 얼마나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이 세상의 구세주가 된 하느님 아들의 사랑을 말입니다.

  이 집에는 신경질적이고 격하기 쉬운 사람도 없고, 무뚝뚝한 표정도 없으며, 서로 비난하는 것도 없고, 그들에게 물질적인 안락을 크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대하여는 더구나 비난을 하지 않는다. 요셉은 마리아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고 비난하지 않고, 마리아는 요셉에게 더 안락하게 해 주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거룩하게 서로 사랑한다. 그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는 그 둘의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고 배우자의 이익이다. 참다운 사랑은 이기주의를 모른다. 그리고 참다운 사랑은 이 방면에 있어서 동정인 두 부부의 사랑만큼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항상 순결하다. 사랑과 결합한 순결은 그 뒤에 다른 덕행들을 줄줄 따라오게 하며 순결하게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하여 부부로서의 완전을 이룩한다.

  내 어머니와 요셉의 사랑은 완전하였다. 이 사랑은 일체의 다른 덕행으로 이끌어 갔고, 특히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끌어 갔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육체와 마음에 괴로워도 이들은 항상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이 두 성인에게서는 정신이 더 생생하게 살아 있어 모든 것을 지배하였다. 이 정신으로 그들은 주께서 그들을 당신의 영원한 아들의 보호자로 택하신 것을 감사하며 주를 찬미하게 되었었다.

  이 집에서는 기도를 하였다. 지금은 가정들에서 너무도 기도를 적게 한다. 새벽과 황혼에도 그렇고, 식탁을 대하고 앉을 때에도 주를 생각하지 않는다. 또 새로운 날을 보게 허락하시고, 다시 밤을 맞이하게 허락하셨으며, 너희들의 피로에 강복하셔서 너희들에게 그 음식, 그 불, 그 옷, 그 집, 그리고 너희들의 인간 처지에서 역시 필요한 저 모든 물건들을 마련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주께 대한 생각은 안한다는 말이다. 인자하신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항상 ‘좋다’. 비록 그 재물이 초라하고 풍족하지 않더라도, 사랑은 그것들에 맛과 가치를 준다. 영원하신 조물주를 너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보게 하는 사랑이 말이다.

  이 집에서는 소찬에 만족하였다. 돈이 없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살기 위하여 먹었지, 폭음 폭식가와 같이 게걸스럽게 그리고 미식가들과 같이 변덕스럽게 식도락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먹지는 않았다. 폭음 폭식가들과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들은 배불리 먹지 못하는 사람이나 음식을 절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절제하면 많은 사람에게 굶주림의 고통을 면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몸이 둔해지도록 음식을 먹으며 비싼 물건으로 그들의 재산을 낭비한다.

  이 집에서는 노동을 사랑한다. 돈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노동을 사랑할 것이다. 일을 함으로써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움직이지 않는 덩어리 같은 게으름뱅이들을 끈질긴 담쟁이같이 꽉 죄어 숨막히게 하는 악습을 면하기 때문이다. 일을 잘 하고 난 뒤에는 음식이 맛있고 휴식이 기분 좋고 마음을 만족스럽게 하며, 이 일과 다음 일 사이에 일순간의 휴식의 값을 알게 된다. 노동을 사랑하는 사람의 집과 정신에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악습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악습이 거기서 자라지 않기 때문에 상호간의 애정과 존중과 존경이 발전한다. 순결한 분위기 속에서는 성덕의 꽃이 필 미래의 가정을 이룩할 다정스러운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란다.

  이 집에서는 겸손이 지배한다. 오만한 너희들에게는 얼마나 큰 겸손에 대한 교훈이냐! 마리아는 인간적으로 말하면 교만해지고 그의 배우자의 숭배를 요구할 만한 수없이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남편보다 더 넓은 교양을 가졌다든지, 더 고귀한 집안 출신이라든지, 재산이 더 많다든지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고 정배이다. 그러나 배우자를 섬기고, 배우자더러 자기를 섬기게 하지 않으며, 그에 대하여 온갖 애정을 기울인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신 집안 어른이며. 가장이 되어 강생하신 말씀과 영원하신 성령의 정배를 보호하라는 책임을 하느님에게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리아에게 피로와 일을 덜어 주려고 온갖 주의를 기울여 보살핀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마리아에게 피로를 면해 주기 위하여 집안의 가장 궂은일들은 도맡아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마리아를 기쁘게 해 주고, 집을 더 편리하게 하고 작은 정원을 꽃으로 더 명랑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애를 쓴다.

  이 집에서는 초자연적, 도덕적, 물질적 질서를 존중한다. 하느님은 가장 높으신 어른이시므로 그분께 공경과 사랑을 드린다. 이것이 초자연적인 질서이다. 요셉은 가장이므로, 그에게 애정과 존경과 복종을 드린다. 이것은 도덕적 질서이다. 집은 옷과 가구와 더불어 하느님의 선물이다. 무슨 일에든지 하느님의 섭리가 나타난다. 양들에게 털을 주시고, 새들에게는 깃을, 풀밭에는 푸르름을, 가축들에게는 여물을, 가금들에게는 낟알과 잎을 주시며 골짜기의 백합들에게는 옷을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집과 옷과 가구들을 그것들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을 찬미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고, 주의 선물로서 경건하게 다루며, 그것들이 초라하다고 해서 마지못해 바라보지도 않고, 섭리를 남용하여 그것들을 망가뜨리지도 않는다. 이것은 물질적인 질서이다.

  너는 나자렛 사투리로 주고받은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였고, 기도의 말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보는 것이 큰 교훈이 되었다. 많은 일에 하느님을 모욕하고, 그 중에도 내 어머니와 아버지였던 거룩한 부부가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았던 일에서 하느님을 모욕한 탓으로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 너희들은 이 교훈을 묵상하여라.


  그리고 너는 어린 예수를 기억하면서 기뻐하여라. 그의 작은 어린아이 걸음을 생각하면서 미소하여라. 얼마 안 있어 그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눈물의 환시가 될 것이다.”





 63. “나는 성장(成長)의 법칙이 면제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 세상이 가졌던 성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두 성인의 애정에 감싸여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행복하였던 내 어린 시절을 보여줌으로써 너를 위로하였다.


  요셉이 내 양부였다는 말들을 한다. 물론 그는 남자였으므로 자기 젖으로 나를 기른 마리아처럼 내게 젖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게 빵과 튼튼하게 하는 음식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일하느라고 몸이 고달팠었다. 요셉은 내게 대하여 친어머니와 같은 애정을 가졌었다. 나는 그에게서 어린 아이를 어른이 되게 하는, 그것도 밥벌이를 해야 하는 어른이 되게 하는 것을 배웠다-그런데 그보다 더 훌륭한 선생을 모셨던 제자는 일찍이 없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내 지능은 완전하였지마는, 나는 성장의 법칙이 면제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또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으로서의 나의 완전한 지능을 인간적인 이해력의 수준에까지 낮추어서, 사람을 스승으로 가지고, 스승의 필요를 느끼도록 나 자신을 억제하였다. 그 후 내가 빨리 배웠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인하여 내가 스스로 한 사람에게 매여 있었다는 공로가 내게서 없어지지도 않고, 또 그 의인에게서도 내 어린 지능을 생활에 필요한 지식으로 길러 준 공로가 없어지지 않는다.

  장난하는 것처럼 하면서 나로 하여금 일을 할 수 있게 되도록 이끌어 가던 요셉 곁에서 지낸 즐거운 시간들을, 나는 천국에 있는 지금 잊지 못하겠다. 추정상의 내 아버지와 작은 정원과 연기로 검게 된 작업장을 머리에 다시 떠올릴 때면, 집을 희한한 것이 되게 하고 나를 몹시 기쁘게 하던 그 미소를 머금은 엄마가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다른 누구도 서로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을 만큼 서로 사랑한 부부의 이 완전에서 가정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느냐 !

  요셉은 가장이었다. 가정에서 그의 권위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 권위 앞에서는 하느님의 정배이며 어머니인 분의 권위도 공손히 굴복하였고, 하느님의 아들도 그 권위에 복종하였다. 이론도 없고 이의도 없고 반대도 없이 요셉이 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모두가 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말은 우리가 따르는 우리의 작은 법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얼마나 겸손하였느냐! 권력의 남용이 절대로 없었고, 그가 권위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오는 이치에 맞지 않는 기분은 절대로 없었다. 아내는 그의 친절한 고문이었고, 크나큰 겸손으로 아내가 자기를 그의 배우자의 종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요셉은 은총이 가득한 그 여자의 지혜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인도하는 빛을 얻어내곤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나를 보호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내 위에서 서로 얽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기운찬 두 그루 나무의 보호를 받는 꽃과 같이 자라고 있었다.

  내가 어려서 세상을 모르는 동안은 천국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분들이 그곳을 떠나 계시지 않았었고, 그 집에서 그들을 멀리 떠나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천사들도 그곳에 줄곧 머물러 있었다. 나는 천사들 중의 하나가 육체를 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짐에서 해방되어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이익만을 돌보는 일과 치품천사(熾品-세라핌-Seraphim)들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그분을 사랑하는 데에만 전념하는 천사와 같은 영혼을 가진 요셉이었다. 요셉의 눈길! 땅의 정욕을 모르는 별의 빛과 같이 조용하고 깨끗한 눈길. 그것은 우리의 안식이요 우리의 힘이었다.

  우리 집을 지키던 이 성인의 눈길이 사라졌을 때 내가 인간적으로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하느님이었고, 또 하느님인 만큼 요셉의 복된 운명을 알고 있었고, 또 이 이유로. 림보(Limbes)에서 잠깐 머물게 한 다음 하늘나라의 문을 그에게 열게 되었던 그의 떠남을 슬퍼하지 않았지만, 사람으로서의 나는 그의 다정스러운 존재가 없어진 집에서 울었다. 나는 사라진 친구를 슬퍼하며 울었다. 내게 그다지도 가깝던 이 성인의 떠남을 내가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느냐? 아주 어렸을 적에 그 가슴에서 잠을 잤던 이 성인, 그렇게도 여러 해 동안 나를 사랑으로 감싸 주었던 이 성인의 떠남을 말이다.

  끝으로 나는 세상의 부모들에게 어떻게 요셉이 교육학적 소용과 도움 없이 나를 착실한 일꾼을 만들 수 있었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내가 연장을 다룰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요셉은 나를 무위 속에 오래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지 않고 일을 시작하게 하였고, 마리아에게 대한 내 사랑을 그의 첫째 보조자를 만들어 나를 일하도록 격려하였다. 엄마를 위하여 유익한 물건들을 만들어라, 요셉은 이렇게 하여 아들이면 누구든지 엄마에게 대하여 가져야 할 존경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미래의 목수를 양성하는 데 존경과 사랑이라는 이 지렛대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오늘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을 어린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들에게 노동을 사랑하게 하는 가정이 어디 있느냐? 지금은 자녀들이 집안에서 폭군이다.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에 대하여 냉혹하고 무관심하고 무례하게 자란다. 그들은 부모를 그들의 하인으로, 그들의 종으로 본다. 자녀들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그들에게서도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너희들이 너희 아들들을 성질내는 난폭한 자들을 만들어서, 부끄럽게도 그들과 갈라져서 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 아들들은 모든 사람의 아들들이다. 20세기의 부모들아, 그러나 그들은 너희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훨씬 더 유모나 가정교사의 아들들이며, 너희가 부자인 경우에는 그들이 중학교에 속해 있다. 너희들이 가난한 사람이면, 그들은 동무들에게, 거리에, 학교에 속해 있다. 그들이 이제는 너희들 것이 아니다. 너희들 어머니는 그들을 낳아 준다. 그 뿐이다. 너희들 아버지는 그들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은 다만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지능과 마음과 정신을 가진 인간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지능과 이 마음과 이 정신을 도야할 권리와 의무를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더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믿어라.

  가정은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 파멸을 초래하지 않고 이 진리에 대립하는 이론이나 진보는 없다. 해체되는 가정에서는 장차 점점 더 타락하고 더 큰 파멸을 가져오는 남녀밖에 올 수가 없다. 그래서 너희에게 단단히 이르는 말이지만, 원숭이족들이 화합해 있는 것보다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가정들과, 덕행과 근로와 사랑과 종교의 학교가 아니라 제대로 맞추어지지 않아서 결국은 부서지고야 마는 톱니바퀴 장치 모양으로 각자가 자기를 위하여 사는 무질서한 가정들이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 결혼이 없어지고 아이들이 없게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부수고 해체하여라. 사회 중에서 가장 거룩한 사회의 이 해체의 결과를 너희는 보고 또 겪는다. 자, 너희들이 그러고 싶으면 계속하여라. 그러나 이 세상이 점점 더 지옥이 되고 가정과 민족을 잡아먹는 괴물들의 소굴이 된다 해도 한탄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니,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다.”



 64. 예수와 유다와 야고보의 선생 마리아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작은 요한(마리아 발또르따)아, 와서 보아라. 너를 인도하는 내 손에 잡혀서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네가 보는 것은 모두 내 어린 시절의 복음에 써 넣어야 한다. 거기에는 성가정이 에집트에 머무른 시절에 대한 환상도 적어야 한다. 이런 순서로 써라. 에집트에 있는 성가정, 그 다음에는 아기 예수의 일에 대한 첫 번째 학습, 또 그 다음에는 지금 묘사할 광경, 그러고 나서는 성인예식 광경(오늘 11월 25일에 약속된 것), 끝으로 열두 번째 과월절 때 성전에서 학자들 사이에 있는 예수에 대한 광경이다. 내가 오늘의 광경을 네게 보이려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오히려 그 광경은 내 아주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사정과 친척들과의 관계를 밝혀 준다. 이것은 내 왕권의 축일에 네게 주는 선물이다. 네가 나자렛의 집을 볼 때에는 그 집의 평화가 너 자신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는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써라.”


  나는 보통 식사를 하고 마리아가 베를 짜거나 바느질을 하는 방을 본다. 이 방 옆방은 요셉의 작업장인데, 그곳에서는 그가 활발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반대로 이곳은 조용하다. 마리아는 길쭉한 모직물들을 꿰매고 있다. 틀림없이 마리아가 짠 옷감일 것이다. 그 천은 너비가 50센티미터쯤 되고, 길이는 그 곱절 쯤 된다. 요셉의 겉옷인 모양이다. 정원 쪽으로 열린 문으로는 보통 “마리아꽃” 또는 “별 박힌 하늘”이라고 부르는 자주색을 띤 하늘색의 저 마가레트가 마구 헝클어져 있는 울타리가 보인다. 정확한 식물학 용어는 모르겠다. 그 꽃이 핀 것으로 보아 가을인 모양이다. 그러나 나뭇잎들이 아직 예쁜 초록빛을 띠고 무성하게 있고, 양지바른 담에 기대어 놓은 벌통 두 개의 벌들은 햇빛이 환한 가운데를 무화과나무에서 포도나무로 그 다음에는 둥근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석류나무로 윙윙거리고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석류들은 너무 익어서 터져서, 노란 칸이 지어진 빨갛고 푸른빛 상자 속에 줄지어 들어 있는 달콤한 홍옥 목걸이들을 보여 준다.

  나무 아래에서는 예수가 거의 같은 나이 또래의 두 어린아이와 같이 놀고 있다. 그들도 머리털이 굽슬굽슬하지만 금발은 아니다. 그 중 하나는 정말 갈색이다. 검은 어린 양의 머리 같아서, 자줏빛을 띤 매우 아름다운 두 눈을 가진 둥근 얼굴의 흰 살갗이 더 돋보인다. 또 한 아이는 머리털이 덜 굽실거리고 짙은 밤색이며, 눈도 밤색이다. 그의 살갗은 더 갈색이다, 그러나 뺨은 약간 볼그레한 기운을 띠고 있다. 짙은 빛깔인 두 머리털 사이에 금발머리를 한 예수는 벌써 빛나는 후광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함께 의좋게 작은 짐수레들을 가지고 노는데, 짐수레에는 나뭇잎, 조약돌, 리본, 나무 조각 따위 여러 가지 상품이‥‥실려 있다. 그들은 장사꾼 놀이를 한다. 예수는 엄마를 위하여 물건을 사는 손님이다. 예수는 어떤 때는 이 물건, 어떤 때는 저 물건을 가져온다. 마리아는 미소 지으면서 그가 사오는 것을 받는다.

  그러나 다음에는 놀이가 바뀐다. 두 아이 중의 하나가 제안한다. “에집트를 건너질러 떠나오는 놀이를 하자. 예수는 모세가 되고, 나는 아아론, 너는‥‥마리아가 되어라.”

  “그렇지만 난 사내아인데!”

  “상관없어. 그래도 마리아가 돼라. 너는 마리안데,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는 거야. 이 리본이 금송아지가 될 거야.”

  “난 춤 안 춰, 난 남자야, 여자가 되기는 싫어. 난 믿는 사람이야, 우상 앞에서 춤은 안출 테야.”

  예수가 개입한다. “이 대목 놀이는 하지 말고 다른 놀이를 하자.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뽑혔을 때 놀이를 하자. 그러면 흉악한 우상숭배 문제도 없어지고, 유다는 남자로 내 후계자가 되는 것이 기쁠 거야. 너 좋지?”

  “그래, 예수야,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너는 죽어야 한단 말이야. 모세가 그 다음에 죽었으니까. 나는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는 네가 죽는 거 싫어.”

  “우린 모두 죽어야 해‥‥그렇지만 나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 축복할 거야. 그리고 너희들밖엔 없지만 너희에게 축복하면서 온 이스라엘에 축복할 거야.”

  그래서 모두 받아들인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생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오랫동안 걸은 다음에도 에집트에서 나올 때에 가지고 있던 짐마차들을 아직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의견이 서로 달랐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한다. “엄마,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짐마차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야고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 그리구 유다는 누구 말이 옳다고 할지 몰라. 엄만 알아?”

  “그래, 안다. 유목민이라 아직 짐마차들을 가지고 있었다. 멈춰 설 때에는 짐마차들을 고치곤 했단다. 짐마차에는 가장 몸이 약한 사람들이 탔었고, 또 그 많은 백성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남자들이 메고 다닌 결약의 궤를 빼놓고는 나머지 모두가 짐마차에 실려 다녔다.”

  문제가 해결되었다. 아이들은 정원 안쪽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성시를 읊으면서 집을 향하여 온다. 예수가 앞장서서 오면서 은소리 같이 맑은 목소리로 성시를 노래한다. 그 뒤로는 유다와 야고보가 성막을 나타내는 짐수레를 들고 온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와 아아론의 놀이 외에 백성의 놀이도 해야 하므로, 허리를 끌러 가지고 꼬마 짐마차들을 발에 매고 진짜 배우들 모양으로 진지한 태도로 행렬을 한다. 그들은 덩굴을 올린 정자를 다 지나서 마리아가 있는 방 문 앞을 지나가면서 예수가 마리아에게 말한다. “엄마. 지나가는 성막에 인사해.” 마리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일어나, 태양의 후광 속에서 빛나는 얼굴로 지나가는 예수에게도 몸을 숙인다.

  그런 다음 예수는 집의 경계, 아니 그보다도 정원의 경계가 되는 깎아지른 곳을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 동굴 위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명령과 약속들을 말하고,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소개하고, 그를 자기에게로 부른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유다가 깎아지른 곳으로 올라간다. 예수는 유다를 격려하고 그에게 축복한다. 그런 다음 널빤(이것은 넓은 무화과나무 잎이다)을 가져오라고 하여 성가를 쓰고 그것을 읽는다. 전부는 아니고 꽤 많은 부분을 읽는데, 나뭇잎에 쓴 것을 읽는 것 같다. 그런 다음 여호수아에게 작별인사를 하니 여호수아는 울면서 그에게 입을 맞춘다. 그러자 예수는 더 높이, 깎아지른 곳 꼭대기로 올라간다. 거기에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즉 땅에까지 닿도록 엎디어 있는 두 아이에게 축복하고 나서. 짧은 풀 위에 누워 눈을 감고‥‥죽는다.

  마리아는 미소 지으면서 문지방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예수가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외친다. “예수야, 예수야, 일어나거라! 그렇게 하고 있지 말아라! 엄마는 네가 죽은 걸 보고 싶지 않다!”

  예수는 방긋 웃으면서 일어나 마리아에게로 달려가 입을 맞춘다. 야고보와 유다도 와서 그들도 마리아에게서 애무를 받는다.

  “어떻게 예수는 그 길고 어려운 성가와 축복들을 욀 수 있어?‥‥”하고 야고보가 묻는다.

마리아는 미소하면서 이렇게만 대답한다. “예수는 훌륭한 기억력을 가졌고, 내가 읽을 때에 아주 주의해서 듣는단다.”

  “난 학교에서 정신을 차리지만, 그 애가들을 듣고 있으면 이내 잠이 들고 말아‥‥그럼 난 도무지 외지 못하게 될까?”

  “너도 배우게 될 거다. 염려 말아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요셉이 빨리 정원과 방을 지나가서 문을 연다.

  “알패오와 마리아, 형님네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들에게 평화와 축복이 있기를.”

  요셉의 형과 그의 아내이다. 든든한 나귀가 끄는 투박한 짐마차 하나가 길 가운데 멈춰 있다.

  “무사히 다녀왔소?”

  “아주 잘 다녀왔어. 그래 아이들은?”

  “마리아와 같이 정원에 있소.”

  그러나 아이들은 벌써 엄마에게 인사를 하려고 달려온다. 마리아도 예수의 손을 잡고 온다. 두 동서가 포옹한다.

  “애들이 얌전히 굴었어요?”

  “아주 얌전하고 귀엽게 굴었어요. 친척들이 모두 잘 있어요?”

  “모두 다 잘들 있어요. 그리고 가나에서 포도, 사과, 치즈, 꿀, 이 선물들을 모두 동서네한테 보냈어요. 그리고‥‥요셉은 ? 예수에게 주려고 구해오라고 한 바로 그것을 발견했어요. 짐마차 위에 있는 저 큰 둥근 바구니에 들어 있어요.” 알패오의 아내는 웃는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자기를 올려다보는 예수에게로 몸을 숙인다. 그의 새파란 두 눈에 입을 맞추며 말한다. “너한테 뭘 가져왔는지 아니? 알아맞혀 봐라.”

  예수는 곰곰이 생각하지만 찾아내지 못한다. 나는 예수가 요셉에게 깜짝 놀랄 선물을 하는 기쁨을 주기 위하여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요셉은 둥근 바구니를 들고 돌아온다. 요셉은 바구니를 예수 앞에 땅에 내려놓고, 뚜껑을 제 자리에 있게 맨 새끼를 끊고 뚜껑을 쳐든다‥‥.그러니까 매우 깨끗한 건초로 된 잠자리에 잠들어 있는 아주 하얀 작은 양이 꼭 진짜 거품 뭉치같이 나타난다.

  예수는 놀라고 몹시 기뻐서 “오!” 하는 소리를 낸다. 예수는 작은 짐승에게로 달려가려고 하다가 몸을 돌려, 아직 땅으로 몸을 구부리고 있는 요셉에게로 뛰어 간다. 그리고 그를 껴안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입을 맞춘다.

  사촌들은 작은 동물을 감탄하며 들여다본다. 양은 잠을 깨서 그 볼그레한 작은 부리를 쳐들고 어미를 찾으며 매애 하고 운다. 바구니에서 꺼내서 토끼풀 한 줌을 주니. 그 온순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먹는다.

  예수는 “내거야 ! 내거야 ! 아버지, 고마워요 !” 하고 말하기 시작한다.

  “썩 마음에 드냐?”

  “오! 꼭 마음에 들어요! 하얗고 깨끗한‥‥새끼 양‥‥아이고 좋아!” 그러면서 팔을 양의 목에 감는다. 그리고 작은 동물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갖다 대고 만족스러운 태도로 그대로 있다.

  “너희들에게도 두 마리를 가져왔다.” 하고 알패오가 아들들에게 말한다. “그렇지만 그놈들은 검정색이다. 너희들은 예수처럼 질서가 잡히지 않아서 그놈들이 흰빛깔이면 늘 깨끗하게 보존하지 못할 거다. 이게 너희 양떼가 될 거다. 그놈들을 같이 지켜라. 그러면 너희 두 장난꾸러기가 길거리로 돌아다니며 돌이나 던지고 하지는 않게 될 거다.”

아이들은 짐마차로 달려가서 흰빛깔이기보다는 오히려 검정색인 다른 두 마리 양을 본다.

  예수는 그의 양을 데리고 그대로 있었는데, 그놈을 안고 정원으로 가서 물을 먹인다. 그러니까 양은 예수를 오래 전부터 알던 것처럼 졸졸 따라다닌다. 예수는 양을 부른다. 그 양에게 “흰 눈”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양은 매애 하고 울면서 기쁘게 대답한다.

손님들은 식탁 앞에 앉았고, 마리아는 그들에게 빵과 올리브와 치즈를 대접한다. 마리아는 능금주인지 꿀물인지 모를 것이 든 항아리를 가져온다. 나는 액체가 맑은 것을, 완전히 맑은 것을 본다. 어른들끼리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세 마리 양을 데리고 노는데, 예수가 다른 양들에게도 물을 주고 이름을 지어 주려고 함께 모으고자 하였었다. “유다야, 네 양은 이마에 무슨 표적이 하나 있으니까 ‘별’이라고 이름 붙이자 또 네 양은 죽은 히이드(heath)의 어떤 불꽃의 빛깔을 띠고 있으니까 ‘불꽃’이라고 부르자.”

  “좋아.”

  어른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알패오가 말한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 사이의 논쟁은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셉, 네가 내게 그렇게 할 생각을 주었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 동생은 예수의 기분을 좀 달래기 위해서 그에게 줄 어린 양 한 마리를 원한다. 나도 이 애들을 위해서 양 두 마리를 사서, 그 애들을 좀 조용하게 하고, 다른 친척과 머리나 무릎 벗어진 데 대한 말다툼이 없게 하겠다. 학교에 좀 가고, 양을 좀 돌보고 하느라면, 그 애들을 조용하게 할 수 있을 거다’ 하고. 하지만 올해는 너도 예수를 학교에 보내야겠다. 나이가 되었으니까.”

  “저는 절대로 예수를 학교에 보내지 않겠어요.” 하고 마리아가 그의 말을 끊으며 말한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이렇게 말하고, 또 요셉을 앞질러 말하는 데 놀랐다.

  “왜요? 어린아이는 때가 되어 성인례의 시험을 치르려면 배워야 합니다‥‥.”

  “아이가 교육은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에는 안갑니다. 이것은 결정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하는 오직 하나뿐인 여자일 것입니다.”

  “저는 오직 한 여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요셉, 그렇지요?”

  “맞아요. 예수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요. 마리아는 성전에서 교육을 받아서 율법에 대한 지식에는 진짜 박사예요. 마리아가 예수의 선생이 될 거예요. 내 뜻도 그래요.”

  “너희들은 그 애를 너무 귀여워한다.”

  “형은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예수는 나자렛에서 제일 착한 아이예요. 예수가 우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변덕을 부리고 복종을 거절하고 존경을 안 한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 일은 없었지. 하지만 계속 너무 귀여워하면 그렇게 될 거다.”

  “자기 아이들을 자기 곁에 데리고 있는 것이 그 애들을 너무 귀여워하는 것은 아니예요. 아이들을 지혜롭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예수를 이렇게 사랑해요. 그리고 마리아가 학교 선생보다 더 유식하니까 마리아가 예수의 선생이 될 겁니다.”

  “그러면 네 예수가 어른이 되면, 파리 한 마리까지 무서워하는 계집애 같은 녀석이 될 거다.”

  “아니, 그렇겐 안 될 거예요. 마리아는 씩씩한 교육을 할 줄 아는 강한 여자예요. 나도 약한 사람이 아니고, 씩씩한 모범을 보일 줄 알아요, 예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결점이 없는 아이예요.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올바르고 강하게 자랄 것입니다. 형, 염려 말아요. 예수는 가문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뿐 아니라, 이것은 결정이 된 일이니까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마리아가 결정했고, 너는‥‥.”

  “하지만 그것이 참된 일이라면요?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편의 견해를 받아들여 자기의 것을 만들기 때문에 같은 생각과 같은 의지를 가질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 아니예요? 만일 마리아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원하면, 나는 ‘안 되오’ 하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요구하는 것은 대단히 현명한 일이기 때문에 나도 그것을 찬성하고 내 의견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첫날과 같이 서로 사랑합니다‥‥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늘 그럴 거요. 그렇지 않소, 마리아?”

  “요셉, 그래요. 그리고 이런 일이 절대로 없기를 바라지만, 한 사람이 먼저 죽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래도 서로 사랑할 거예요.”

요셉은 마리아가 아직 어린아이인 것같이 머리를 쓰다듬으니, 마리아는 평온하고 정다운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큰동서가 개입한다. “두 분 말이 대단히 옳아요. 아 ! 나도 가르칠 수 있었으면 ! 학교에서는 우리 아들들이 선과 악을 다 배우고 있어요. 그렇지만 가정에서는 선만을 배웁니다. 그렇지만 나는 몰라요‥‥ 만일 마리아가‥‥.”

  “형님.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예요? 거북하게 생각 마시고 말씀하세요.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형님을 사랑하고 형님을 기쁘게 해 드리면 저도 기뻐요.”

  “내 말은‥‥ 야고보와 유다가 예수보다 나이가 조금 위여서, 벌써 학교에 다니지만‥‥ 그 애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 이와 반대로 예수는 벌써 율법을 썩 잘 알아요 ! 그래서 말인데 ‥‥ 동서가 예수를 가르칠 때 그 애들도 받아 주겠어요?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이 더 착해지고 더 배우는 것이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결국 아이들은 사촌간이고, 서로 형제같이 사랑하니 좋아요‥‥. 난 참 좋겠어요 !”

  “만일 요셉이 좋다고 하고 아주버님도 좋다고 하시면, 얼마든지 그럴 생각이 있어요. 한 아이를 위해서 말하나 세 아이를 위해서 말하나 마찬가지예요. 성경을 다시 한번 본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아이들을 보내세요.”

  세 아이가 살그머니 들어왔다가 이 말을 듣고는 결정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애들이 계수님을 실망시킬 겁니다” 하고 알패오가 말한다.

  “아니예요 ! 그 애들이 저한테는 늘 착하게 굴어요. 내가 너희들을 가르치면 얌전히 굴겠지?”

  두 아이는 마리아 곁으로 달려가,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서서 마리아의 목에 팔을 감고 머리를 어깨에 기대고 단단히 약속한다.

  “아주버니, 그 애들을 해보게 놔두세요. 그리고 저도 해보게 하시구요. 아주버니가 불만족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이 애들을 매일 오후 제6시(오정)에 보내세요. 그거면 충분해요, 틀림없어요. 저는 피로하지 않게 하면서 가르치는 기술을 알아요. 어린아이들은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기분을 달래주게 돼요.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 애들에게서 사랑을 받아야 해요. 그러면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얻어냅니다. 그때 너희들은 나를 좋아하지?”

커다란 입맞춤 두 번이 대신 대답한다.

  “아시겠어요?”

  “알겠소. 이제는 계수님한테 ‘고맙다’는 말 밖에 할 것이 없군요. 그런데 예수는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을 보고 뭐라고 할까요? 어떠냐 예수야?”

  “나는 ‘그 여자 곁에 있으면서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집 곁에 거처를 정하는 사람은 복되다’고 말하겠어요. 지혜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어머니의 친구가 되는 사람은 복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의 친구가 되는 것이 나도 기뻐요.”

  “아아니 ! 누가 어린아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게 했지?” 알패오가 놀라서 묻는다.

  “아무도 그런 사람 없어요, 형 이 세상의 아무도.”

  -여기서 환상이 끝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가 나와 야고보와 유다의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친척관계 이외에 지식과 교육으로 마치 한 줄기에 달린 세 개의 포도나무 가지와 같이 결합하여 형제처럼 서로 사랑하였다. 이스라엘에서 당할 사람이 없을 박사인 내 엄마가, 다정스러운 내 엄마가 말이다. 지혜와 참지식의 본거인 내 어머니가, 마리아가 세상의 생활과 천국의 생활을 위하여 우리를 가르쳤다. ‘우리를 가르쳤다’고 말한 것은 나도 내 사촌들과 같이 엄마의 생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의 호기심에 대하여 하느님의 비밀 위에 찍힌 봉인이 일반 사람의 생활이라는 외형 속에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기분 좋은 광경을 보고 즐거웠느냐? 이제는 편안히 있어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 역주 . 이런 꽃 이름은 우리나라에는 없다.


 67. 성전에서 있은 예수의 성인례를 위한 시험



  명절 때의 성전이다. 군중이 성벽의 여러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고 하며, 마당과 안뜰과 회랑들을 지나서, 성전의 건물 집단이 흩어져 있는 각기 다른 높이의 땅에 세워진 이 건물 저 건물로 사라진다.

  작은 소리로 성시를 읊으면서 예수의 가족의 집단도 들어온다. 남자들이 먼저 들어오고, 다음에는 여자들이 들어온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과 합류했는데, 어쩌면 나자렛에서 왔는지, 예루살렘의 친구들인지, 모르겠다.

  지극히 높으신 분을 예배한 다음, 내 생각에는 남자들만이 예배를 할 수 있는 장소에서, (여자들은 조금 아래서 멈춰 섰다) 요셉은 아들을 데리고 마당들을 반대 방향으로 다시 건너온다. 그는 어떤 곳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어떤 넓은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은 교회당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성전 안에도 교회당들이 있는 것인가? 요셉은 레위파 사람 하나와 말을 한다. 그 사람은 줄무늬가 있는 휘장 뒤로 사라졌다가 나이 많은 사제들과 같이 돌아온다. 나는 그들이 사제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율법지식으로 선생들이고, 그래서 신자들을 시험할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예수를 소개한다. 그보다 먼저 두 사람은 별로 높지 않은 나무 걸상에 점잖게 자리 잡은 열 명쯤 되는 박사들 앞에서 몸을 깊이 숙여 인사를 하였다.

  “이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석 달 열이틀 전에 율법에서 성년이라고 이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들이 이스라엘의 계명에 따라 성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아이의 체질로 보아 그가 유년 시대를 벗어났고 이미 미성년자가 아님을 보여 준다고 간주하시기 부탁드립니다. 이 아이의 아비인 제가 여기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판단하기 위하여 친절과 정의로 시험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시간을 위하여, 그리고 그가 되어야 하는 율법의 아들로서의 품위를 위하여 이 아이를 준비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계명과 경외전설과 양피지에 적힌 관습과 양피지에 적힌 성서의 문구들을 압니다. 매일의 기도와 축복을 욀 줄 압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사나이답게 율법 자체와 할라쉬야(Halalcia)와 미드라스크(Midrasc)와 아가다(Agada)라는 율법의 세 가지 분야의 설명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이 아이의 행동과 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이 아이가 계명에 복종하고, 계명을 소홀히 하는 데 대한 벌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아이를 시험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소. 얘야, 앞으로 나오너라. 이름이 무엇이냐?”

  “나자렛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나자렛 사람‥‥ 그럼 글을 읽을 줄 아느냐?”

  “예. 저는 씌어진 말과 그 말 자체에 들어 있는 말을 읽을 줄 압니다.”

  “무슨 뜻이냐?”

  “보이지는 않지만 닫힌 투박한 조개껍질 속에 들어 있는 진주와 같이, 외양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유와 상징의 뜻도 알아듣는다는 말씀입니다.”

  “보통이 아니고 대단히 슬기로운 대답이다. 이런 말은 어른의 입에서도 듣기가 매우 드문 일인데, 어린 아이에게서 그것도 나자렛의 어린 아이에게서 듣게 되다니!”

  열 사람은 주의를 집중하게 되었다. 그들의 눈은 그들을 자신만만하게, 뻔뻔스럽지는 않지만 또한 겁도 내지 않고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금발 소년을 잠시도 놓치지 않는다.

  “너는 틀림없이 대단히 유식한 네 선생님을 명예롭게 한다.”

  “하느님의 지혜가 그의 올바른 마음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보시오, 이런 아들을 두었으니 당신은 참으로 행복하오!”

  홀 끝 쪽에 있는 요셉은 빙그레 웃으면서 몸을 굽힌다.

  그들은 예수에게 세 개의 다른 두루마리를 주며 말한다 “금빛 리본이 달린 두루마리를 읽어라.”

  예수는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는다. 그것은 십계명이다. 그러나 처음 몇 마디를 읽자 심판관이 두루마리를 빼앗으면서 말한다. “계속해서 외어라.”

  예수는 어떻게나 자신 있게 말하는지 꼭 책을 읽는 것 같다. 주님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몸을 깊이 구부린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느냐? 왜 그렇게 하느냐?”

  “이 이름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 속과 겉으로 존경을 표시하면서 이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얼마 동안 밖에는 임금노릇을 하지 못하시는 임금님 앞에서 신하들이 절을 합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으로 밖에는 볼 수 없지만 실제로 여기 계시는 왕 중의 왕, 이스라엘의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앞에서는 그분께 영원한 예속으로 속해 있는 어떤 피조물도 절을 해야 합니다.”

  “좋다 ! 여보시오. 우리는 당신 아들을 힐렐이나 가므리엘에게 사사시키도록 권하오. 이 아이는 나자렛 출신이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니 새로운 큰 박사가 될 것으로 기대하게 되오.”

  “아들은 성인입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의 뜻이 성실하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얘야, 듣거라, 너는 이렇게 말한다. ‘축일들을 거룩하게 할 것을 기억하여라. 그러나 너만을 위하여가 아니라, 네 아들과 네 딸, 네 남종과 네 여종, 또한 짐 싣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고. 그러면 어디 말해 보아라. 만일 안식일에 암탉이 알을 낳거나 양이 새끼를 낳으면 그 달걀이나 어린 양을 이용해도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아주 나쁜 것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저는 많은 율법박사님들이-제일 마지막 분인 쉬암미(Sclammi) 선생님은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만-안식일에 난 달걀은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고 단언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사람 다르고, 짐승이나 또는 새끼를 낳는 것 같은 동물적 행위를 하는 것이 다릅니다. 만일 제가 짐 싣는 짐승에게 일을 시키면. 제가 그 죄의 책임을 집니다. 그것은 제가 채찍으로 위협해서 짐승에게 일을 시키는 데 종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암탉이 그 난소에서 성숙해진 알을 낳거나 양이 새끼가 나올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어린양을 낳으면. 이 행동은 그 자체로도 죄가 아니고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죄가 아니며, 안식일에 나는 달걀도 어린양도 죄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행한 일은 무엇이든지 죄가 된다면, 어째서 그것은 죄가 안 된단 말이냐?”

  “새끼를 배고 낳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각 피조물에게 주신 법칙으로 조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암탉은 일정한 형성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알이 완전해지고 낳아질 준비가 다된다는 것을 예견한 이 법칙을 따르는 일밖에 하지 않습니다. 양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이 법칙에 복종하는 일 밖에 하지 않습니다. 창조주께서는 1년에 두 번, 꽃이 핀 풀밭에 봄의 미소가 올 때와 나무들의 잎이 떨어지고 추위가 사람들의 가슴을 죌 때에 양들의 본능에 복종하도록 조절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수확 때문에 가장 피곤하게 하는 달이나 서리 때문에 가장 을씨년스러운 달을 위하여 그 후 다른 시기에 양분 많은 젖과 고기와 치즈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양이 때가 되어 어린 새끼를 낳으면, 그 어린 양은 신성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창조주께 복종한 결과이기 때문에 제단에 바쳐도 되는 신성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시험을 그만두겠소. 그의 놀라운 지혜는 어른들의 지혜를 앞지르오.”

  “아니오. 이 아이가 상징들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 이 애의 말을 들어봅시다.”

  “우선 시편 하나와 축복과 기도문을 외라고 합시다.”

  “계명들도.”

  “그럽시다. 미드라쉬오를 외워라.”

  예수는 태연하게 “이것을 하지 말아라‥‥저것을 하지 말아라‥‥”하는 것을 지루하게 줄줄 왼다. 만일 불평하기 좋아하는 우리가 지금도 그 모든 구속을 받아야 한다면, 정말이지 구원을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됐다. 이제는 초록색 리본이 달린 두루마리를 펴라.”

  예수는 펴서 읽기 시작한다.

  “더 앞으로 가서, 좀 더 앞으로 가서.”

  예수는 시키는 대로 한다.

  “됐다. 읽고서 상징이 있다고 생각되거든 설명하여라.”

  “거룩한 말씀에는 상징이 없는 일이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상징을 알아내고 그것을 적용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럼 읽겠습니다. 열왕기 4권* 22장 10절, ‘공보대신 사반은 왕에게 <대사제 힐키야가 저에게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하면서 왕의 면전에서 크게 읽었다. 그 율법책의 내용을 듣자 왕은 자기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는‥‥.’ ”

  “이름들은 건너뛰어라.”

  “‘‥‥명하였다. <이번에 찾아 낸 이 책에 여러 가지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나와 온 유다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야훼께 나가 여쭈어 보시오.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우리 선조들이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불길 같은 야훼의 진노를 사게 되었소>‥‥.’”

  “그만 하면 되었다. 이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여러 세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옛날 연대기에 있는 사실에서 너는 어떤 상징을 발견하느냐?”

  “저는 영원한 것을 시간 안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우리의 영혼도 영원하고,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도 영원합니다. 그 때에 벌을 유발했던 것은 지금 벌을 유발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죄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이스라엘은 이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빛은 하느님께 구할 것이지 보잘 것 없는 인간들에게 청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의와 하느님께 대한 충성 없이는 빛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짓고, 하느님께서는 진노하셔서 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지식이 없다고? 아니, 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러면 육백 열세 가지 계명은?”

  “계명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앎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압니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징은 이런 것입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뜻을 알고, 그분의 진노를 자기에게 불러오지 않게 그 뜻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여쭈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완전하오. 엉큼한 질문의 함정도 이 아이의 대답을 당황하게 하지 못하였소. 이 아이를 정말 교회당으로 데려가게 하시오.”

  그들은 더 넓고 더 잘 꾸며진 방으로 건너간다. 여기서 처음 하는 일은 예수의 머리를 짧게 하는 일이다. 요셉이 굽슬굽슬한 잘린 머리카락을 받는다. 그런 다음 그의 빨간 옷에 허리를 여러 바퀴 도는 긴 허리띠를 매 준다. 그의 이마와 팔과 겉옷에 불꽃처럼 생긴 작은 헝겊을 붙인다. 그것들을 장식 핀 같은 것으로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성시를 읊는다. 그리고 요셉은 긴 기도로 주를 찬미하고 아들 위에 가지가지 축복을 청한다.

  예절이 끝났다. 예수는 요셉과 같이 나온다. 그들은 그들이 떠나갔던 곳으로 돌아온다. 가족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어린 양 한 마리를 사서 바치고 나서 목을 딴 희생제물을 가지고 여자들 있는 곳으로 간다.

  마리아는 예수에게 입맞춤을 한다. 예수를 못 본지가 여러 해가 되는 것 처럼 말이다. 마리아는 지금은 어른의 옷과 어른의 머리털을 가진 예수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쓰다듬는다‥‥.

- 그들은 나온다. 그리고 이것으로 환상이 끝난다.


* 역주 :공동번역 열왕기 하 




68. 성전에서 예수가 박사들과 토론함

  나는 예수를 본다. 이제는 소년이다. 흰 아마포로 생각되는 감으로 만든 것으로 발까지 내려오는 속옷을 입었다. 그 위에 밝은 빨강의 장방형 천을 걸쳤다. 귀의 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았는데, 머리털은 그가 더 어렸을 때 보았을 적보다 더 짙은 빛깔이다. 나이에 비하여 매우 큰 건장한 소년이다, 그러나 얼굴은 정말 어리다.

  예수는 나를 바라보고 손을 내밀면서 미소 짓는다, 그러나 벌써 어른이 된 예수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다정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근엄한 빛을 띤 미소이다. 예수는 혼자 있다. 지금은 다른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줄곧 오르락내리락 하는 돌이 많은 작은 길 위에 있는 작은 담에 가까이 있다. 그 길 가운데에는 비가 올 때에는 개울로 변하는 움푹 파인 곳이 있다. 지금은 날씨가 좋기 때문에 말라 있다.

  나도 담으로 가까이 가서 예수가 하는 것과 같이 주위와 아래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줄이 고르게 서 있지 않은 일단의 집을 본다. 높은 집, 낮은 집이 있고, 향이 각각 다르게 앉아 있다. 마치 우중충한 땅에 흰 조약돌 한 줌을 던져놓은 것과 비슷하다. 서투르기는 하지만 꽤 들어맞는 비유이다. 큰 길 작은 길들이 이 흰 가운데에 정맥과 같이 나타난다. 여기저기 담 사이에는 나무들이 보인다. 꽃이 핀 나무도 많고, 새잎이 덮인 나무도 많다. 봄인가보다.

  내가 보아서 왼쪽에는 건물들이 있는 세 개의 질서 정연한 단으로 되어있는 큰 집단이 있고, 또 탑들과 마당들과 회랑들이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는 더 높고 장엄하고 매우 화려한 둥근 지붕들이 달린 건물이 있는데, 그 둥근 지붕들은 구리나 금같은 금속을 입힌 것같이 햇빛에 반짝인다. 이 전체를 요새인 것처럼 M자 모양의 총안이 꼭대기에 장치된 성벽이 에워싸고 있다. 꽤 좁고 불쑥 내민 길에 걸쳐서 세워진 다른 탑들보다 더 높은 탑이 이 넓은 집단 위에 우뚝 솟아 있다. 엄격한 보초와도 같다.

  예수는 이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처음에 하던 대로 다시 등을 담에 기댄다. 그리고 건물 집단 맞은편에 있는 작은 산, 그 밑에까지는 집들이 있다가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 산을 바라다본다. 거기에서 길이 고리 모양으로 되어 끝나고, 그 저쪽으로는 장방형 돌을 불규칙적이고 고르지 못하게 간 길 밖에 없다. 그 돌들은 집정관시대의 로마의 도로에 깔았던 돌처럼 엄청나게 크지는 않다. 오히려 비아렛지오(Viareggio-이탈리아의 도시)의 오래된 인도에 깔려 있는 전형적인 돌들과 비슷하다(그 돌들이 아직 비아렛지오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르게 깔리지는 않았다. 나쁜 길이다. 예수의 얼굴이 하도 근엄하게 되어서 나는 그 작은 산 위에서 그의 침울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헐벗은 작은 산이다. 그뿐이다. 그런데 나는 예수를 잃었다. 과연 내가 뒤돌아 보았을 때 예수는 거기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환상을 보면서 깜빡 졸았다.

  ‥‥이 환상의 기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잠이 깨었을 때, 모든 사람이 자고 있기 때문에 기운과 평온을 좀 되찾은 다음, 내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어느 곳에 가 있게 되었다. 마당들과 샘들과 집들이 있다. 아니 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자들이다 사실 그것들은 집보다는 정자들 같다. 거기에는 옛날 히브리사람들 식의 옷을 입은 많은 군중이 있고 몹시 시끄럽다. 주위를 둘러보고, 내가 예수가 바라보고 있던 그 건물 집단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과연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총안이 있는 성벽과 보초를 서는 것 같은 탑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장엄한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에는 매우 아름답고 넓은 회랑들이 기대서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이런 일 저런 일을 하고 있는 많은 군중이 있다.

  나는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펄럭이는 긴 옷을 입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아마포로 만든 옷을 입고, 가슴 꼭대기와 이마와 다른 부위 곳곳에 귀금속 판을 달고 있는 사제들이 보인다. 대단히 비싼 띠로 허리를 졸라맨 매우 넓은 흰옷 여기저기에서 그 금속판이 번쩍인다. 그리고 그보다 덜 요란스럽게 차린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도 역시 사제계급에 속한 사람들 같으며, 더 젊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나는 그들이 율법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모든 인물들 가운데를 방황하고 있으면서, 내가 거기 무슨 볼일이 있는지를 모른다. 나는 신학 토론이 시작된 박사들의 어떤 집단에 가까이 간다. 많은 무리도 그리로 가까이 온다.

  “박사들” 가운데에는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가믈리엘(Gamaliel)이라는 어떤 사람과, 토론할 때에 가믈리엘을 지지하는 거의 소경이 되다시피한 다른 노인 한 사람이 낀 집단이 있다. 이 노인은 힐렐(Hillel)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이름 첫머리에 기식음-氣息音-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H자를 붙였다), 가믈리엘이 그를 신뢰와 존경을 가지고 다루는 것으로 보아 그의 선생이거나 친척인 것 같다. 가믈리엘의 집단은 더 폭이 넓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더 수효가 많은 다른 집단은 쉬암마이 ( Sciammai)라는 사람이 지휘하는 집단으로 사납고 퇴보적인 비타협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비타협성을 복음성서는 매우 명백하게 설명한다.

  많은 제자의 집단에 둘러싸여 있는 가믈리엘은 메시아의 내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다니엘의 예언에 의거하여 그는 메시아가 벌써 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예언에서 알려준 바 있는 성전 재건 법령으로부터의 70주가 한 10년 전에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쉬암마이는 성전이 재건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노예상태는 더 심해졌을 뿐이고, 예언자들이 ‘평화의 왕’이라고 부르는 메시아가 가져왔어야 할 평화가 세계에도 없고, 특히 원수에게 압제를 당하는 예루살렘에는 평화의 그림자도 없다고 단언하면서 가믈리엘을 공격한다. 쉬암마이는 적이 일체의 애국적 봉기를 그들의 검으로 진압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로마 군대가 확 들어찬 안또니아(Antonia)탑이 내려다보는 성전의 경내에까지 감히 그의 지배를 몰고 온다고 주장하면서 가믈리엘을 공격한다.

  궤변투성이의 토론이 질질 끈다. 양쪽 대가가 박식을 자랑해 보이는데, 그것은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듣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다. 이 의도는 명백하다.

  빽빽한 그 열성분자들 가운데에서 또렷또렷한 어린아이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가믈리엘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군중과 박사들 무리의 동요가 보인다. 방해자를 찾는다. 그러나 찾을 필요도 없다. 방해자는 숨지 않고, 스스로 나타나 ‘선생들’ 집단 쪽으로 가까이 간다. 나는 소년 예수를 알아본다. 예수는 총명한 눈을 반착이며 자신만만하고 솔직하다.

  “너는 누구냐?” 하고 사람들이 묻는다.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려고 온 이스라엘의 아들입니다.”

  과감하고 자신있는 대답으로 인하여 예수는 호감을 얻고 찬성과 호의를 나타내는 미소를 받게 된다. 사람들은 이스라엘 소년에게 흥미를 느낀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자렛의 예수입니다.”

  쉬암마이의 집단에서는 호의가 줄어든다. 그러나 가믈리엘은 더 친절하게 힐렐과 동시에 대화를 계속한다. 아니 그보다도 가믈리엘이 노인에게 “저 아이에게 뭘 좀 물어보십시오” 하고 공손하게 말한다.

  “네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냐?” 하고 힐렐이 묻는다(나는 길이를 줄이고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대답 첫머리에 이름을 써 놓겠다) .

  예수 : “시기에 대해서 그르칠 수가 없는 예언과, 예언이 실현될 시간이 되었을 때 같이 일어났던 표징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70주가 지났을 때는 카이사르가 그의 영토에 호구조사를 명령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가 평온하고 팔레스티나가 조용하였습니다. 그의 제국에 전쟁이 있고 팔레스티나에 반란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기간이 지나간 것과 같이, 성전의 완성으로부터 62주 더하기 1주라는 다른 기간도 끝나 갑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바쳐지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백성에게 그 예언의 계속이 실현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심을 하실 수 있습니까? 동방의 현자들이 보았고 바로 유다의 베들레헴의 하늘에 와서 머물렀던 별을 기억 못하십니까? 그리고 야곱 시대부터 근후로 예언들과 환상들이 그곳을 베들레헴 출신인 다윗을 통하여 야곱의 아들의 아들의 또 아들인 메시아의 탄생을 맞아들이기로 된 곳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 못하십니까? 순결과 믿음으로 인해서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던 동방의 현자들은 그 별을보고 ‘메시아’라는 그 별의 이름을 알아차리고, 세상에 켜진 빛에 경배하려고 왔습니다.”

  창백한 시선을 한 쉬암마이: “너는 베들레헴 에프라타에 별이 나타났을 때 메시아가 났다고 말하는 것이냐?”

  예수 :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쉬암마이 : “그러면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얘야, 너는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서 난지 하루에서 2년까지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게 했다는 것을 모르느냐? 성서를 그렇게도 잘 알고 있는 너니까 ‘부르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라켈이 제 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이다’하는 이 말도 알겠구나. 죽어가는 라켈의 울음을 거두어들인 베들레헴의 산과 골짜기는 그 울음소리로 가득하였고, 어머니들이 학살된 그들의 아이들을 슬퍼하며 되풀이하였다. 그 어머니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메시아의 어머니도 있었다.”

  예수: “노인장 어른, 틀리셨습니다 라켈이 ‘고통의 아들’을 낳았던 그 곳에서 새로운 라켈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 그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아들, 그의 왕권 아래 모든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을 가장 무서운 노예상태에서 해방하기로 되어 있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라켈의 울음은 호산나로 변했습니다.”

  쉬암마이 : “그렇지만 그가 죽었으면 어떻게 그렇게 되겠느냐?”

  예수 :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읽지 못하셨습니까? 엘리야는 불 수레에 실려서 들려 갔습니다. 그런데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임마누엘이 당신 백성의 메시아가 되도록 그를 구하실 수 없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발을 적시지 않고 그의 땅에 도달하도록 모세 앞에 바다를 갈라놓으신 그분이 당신의 아들, 당신의 그리스도를 잔인한 사람에게서 구하라고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지 못하셨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합니다만, 그리스도는 살아 있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때가 오면 그의 능력을 가지고 나타날 것입니다.”  마지막 말을 할 때에 예수의 목소리는 쩡쩡 울려 공간을 채운다. 그의 눈은 한층 더 빛나고 능력과 약속으로 자극되는 것 같으며, 그는 어떤 선서를 하는 것처럼 오른팔과 손을 내민다. 그는 한 소년이다. 그러나 어른과 같이 엄숙하다.

  힐렐 : “얘야, 누가 그 말을 가르쳐 주었느냐?”

  예수 : “하느님의 성령입니다. 저는 사람인 선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제 입으로 들으시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힐렐 : “얘야 ! 너를 자세히 보게 우리 가운데로 오너라. 네 믿음에 접하니 내 바람이 다시 살아나고, 내 영혼이 네 영혼의 태양으로 빛난다.”

  그러면서 예수를 가믈리엘과 힐렐 사이에 있는 높은 의자에 앉히고, 그더러 읽고 해석하라고 두루마리들을 갖다 준다. 이것은 규정에 따른 시험이다. 군중이 몰려와서 듣는다.

  예수는 앳된 목소리로 읽는다.

  “‘내 백성아, 마음을 달래라. 예루살렘의 노예생활이 끝났으니, 그의 마음에 말하고 그를 위로하여라‥‥ 광야에서 외치는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주의 길을 닦아라‥‥그러면 주의 영광이 나타달 것이다.”

  쉬암마이 : “나자렛 아이야, 보아라 ! 여기서는 노예상태가 끝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같이 노예생활을 한 적이 일찌기 없었다. 여기에서 선구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선구자가 어디 있느냐? 너는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다.”

  예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선구자가 권고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선생님입니다. 선생님과 선생님 비슷한 분들에게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은 주의 영광을 못보실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옹졸함과 오만과 허위가 선생님을 보고 듣지 못하게 방해하겠기 때문입니다.”

  쉬암마이 : “선생님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예수 :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제 이해관계 위에는 주님의 이해관계가 있고, 제가 진리의 아들인 만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위해 덧붙여 말씀드리지만, 예언자가 말하고 저도 말하는 노예상태라는 것은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노예상태가 아니고, 완전도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완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메시아의 공로로 사람은 그를 하느님께서 떼어놓은 악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인호가 일체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그의 영원한 통치에 복종하는 모든 영에 박힙니다. 다윗 가문이여, 네게서 난 싹으로 온 땅을 뒤덮고 하늘에까지 이르는 큰 나무가 된 네 앞에 모든 민족이 머리를 숙일 것이다. 하늘과 땅에서 모든 입이 그의 이름을 찬미할 것이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축성을 받은 사람이며 평화의 왕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모든 피로한 영혼을 취하게 하고 굶주린 모든 영혼을 배불리 먹여줄 그 사람, 땅과 하늘 사이에 계약을 맺을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을 에집트에서 나오게 하셨을 때, 아직도 그들을 종으로 취급하면서 그들과 맺으셨던 것과 같은 계약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에 구세주의 공로로 그들에게 새로 부어진 은총과 더불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생각을 새겨 넣으면서 맺는 계약입니다. 구세주를 통하여 모든 착한 사람이 주님을 알 것이고 하느님의 성전이 다시는 쓰러지지도 헐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쉬암마이 : "야 ! 너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 말아라! 다니엘을 상기하여라. 다니엘은 그리스도가 죽은 다음 성전과 성도가 그를 위해서 올 국민과 두목에 의하여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는 하느님의 성전이 다시는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구나! 예언서들을 존중하여라!“

  예수 : “선생님께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만, 예언자들보다 나은 어떤 사람이 있는데 선생님은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지금도 알지 못하시고 후에도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것이 모두 참말이라는 것을 선생님께 단언합니다. 진짜 성전은 다시는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같이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세상 마칠 때에는 하늘에서 살 것입니다.”

  힐렐 : “얘야. 하깨는 이렇게 말한다. ‘‥‥뭇 민족이 바라는 이가 올 것이다. 내가 내리는 영광이 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그리고 지금 짓는 이 성전이 예전의 성전보다 더 영화로올 것이다’ 하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 네가 말하는 것과 같은 성전인 모양이구나?"

  예수: “선생님, 그렇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선생님은 정직하시기 때문에 빛을 향해 가시게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제헌이 완성되면 평화가 선생님께로 올 것입니다. 선생님은 악의가 없는 이스라엘의 자손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믈리엘 : “얘 예수야, 예언자들이 말하는 평화 말이다. 만일 전쟁이 와서 이 백성을 파멸시키면 어떻게 그 평화를 바랄 수 있단 말이냐? 말 좀해서 나도 밝혀 다오.”

  예수: “선생님은 그리스도가 나던 날밤 거기 있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못하십니까?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천사들의 무리가 노래했다는 말을요? 그러나 이 백성의 뜻은 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은 평화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백성은 인간적인 권력을 지닌 왕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정신의 왕이기 때문에 의인이요, 구세주인 그 왕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백성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설교하겠기 때문에 이 백성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전차와 기병대를 갖춘 적과 싸우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의 마음을 극악한 향락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영혼의 원수들과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이스라엘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승리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아, 너의 왕은 ‘암나귀와 나귀새끼’를 타고, 즉 이스라엘의 의인들과 이방인들을 데리고 올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만, 나귀새끼가 그에게 더 충실해서 암나귀보다 앞서서 그를 따를 것이고 진리와 생명의 길에서 커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의 악의 때문에 평화를 잃을 것이고, 그들로 인하여 고통의 인간이 되리라고 이사야가 예언한 그들의 왕에게 당하게 한 것과 같은 고통을 여러 세기를 두고 당할 것입니다.”

  쉬암마이: “나자렛 녀석아, 네 입에서는 유치한 말과 동시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 나온다. 대답 좀 해보아라. 그래 선구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언제 우리가 선구자를 언제 가졌었단 말이냐?”

  예수: “선구자는 존재합니다.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하고 말라키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선구자는 바로 그리스도를 앞서 옵니다. 선구자는 그리스도와 같이 벌써 와 있습니다. 만일 주의 길을 닦는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에 여러 해라는 간격이 있으면, 모든 길이 막히고 빗나가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선구자가 다만 한 시간만 주인보다 앞서 가도록 결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선구자를 보시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전도가 시작 되었구나’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만, 그리스도가 이 길로 해서 오게 되면 많은 눈을 뜨게 하고 많은 귀를 듣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님의 추종자들도 아니고 선생님 같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선생님네는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생명을 갖다주는 대신에 죽음을 그에게 줄 터이니까요. 그러나 이 성전보다 더 크고, 지성소에 들어 있는 장막보다 더 높고, 지품 천사들이 받치고 있는 영광보다도 더 높이 구세주가 그의 옥좌와 제단에 앉게 되면, 하느님을 죽인 자들에 대한 저주와 이방인들을 위한 생명이 그의 수없이 많은 상처에서 흘러 나올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시는 선생님, 되풀이 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지배를 하는 왕이 아니고, 영적인 왕국의 왕이며, 그의 신민은 오직 그들의 사랑을 통하여 그들의 영으로 다시 태어날 줄을 알고 또 요나와 같이 한번 태어난 다음 다른 고장에서 다시 태어날 줄을 알 그런 사람들 뿐이겠기 때문입니다. 즉 참 생명을 인류에게 줄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인 재생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사람들 말입니다.”

  쉬암마이와 그의 측조자들: “이 나자렛 녀석은 사탄이다!”

  힐렐과 그와 추종자들: “아니오. 이 아이는 하느님의 예언자요. 얘야, 우리와 같이 있어라. 이 늙은이가 아는 것을 네 지식에 넘겨주겠다.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백성의 스승이 될 것이다.”

  예수 : “진정으로 말씀드립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많이 있으면 구원이 이스라엘에 올 것입니다. 그러나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목소리가 제게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때가 오기까지 고독한 가운데에서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때가 오면 제 입술과 제 피로 예루살렘에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제 운명은 예루살렘에 의하여 돌로 맞고 암살당한 예언자들의 운명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존재 위에는 주 하느님의 존재가 있어, 저를 당신 영광의 발판을 삼으시라고 저 자신 그분께 복종하면서 그분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발판을 만드시기를 기다립니다. 제 때에 저를 기다리십시오. 이 돌들이 다시 제 목소리를 들을 것이고, 제 마지막 말을 듣고 떨 것입니다. 이 목소리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목소리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을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왕국을 줄 것인데, 여러분의 이기심이 그 왕국이 순전히 인간적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지만, 사실은 천상적인 것입니다. 이 나라가 임하라고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당신의 종이 당신의 뜻을 행하려고 여기 왔습니다. 저는 주님의 뜻을 완수하기를 열망하니, 그 뜻을 완전히 이루십시오’ 하고.”

  그리고 여기서 영적인 정열로 불타는 얼굴을 하늘을 향해 쳐들고 팔을 벌리고 어리둥절한 박사들 가운데에 서 있는 예수의 환상이 끝난다.


  1944년 1월 29일

  저는 여기서 확실히 신부님의 관심을 끌 두 가지 일을 말할 것이 있고, 또 잠이 깨면 그 말을 쓰겠다고 결정도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급한 다른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나중에 쓰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하려고 하던 것을 여기에 쓰겠습니다.

  신부님은 오늘 제가 어떻게 힐렐과 가믈리엘의 이름과 쉬암마이의 이름을 알 수 있었느냐고 물으셨지요. 그것은 제가 ‘제 2의 목소리’라고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이 목소리가 이런 것들을 제게 말해 줍니다. 이것은 제게 쓰라고 불러주는 내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보다는 좀 덜 느낄 수 있는 목소리입니다. 이 목소리들은 벌써 말씀드렸고 다시 되풀이해 말씀드렸지만 진짜 목소리들인데, 제 영적인 오성이 그것을 마치 인간의 목소리인 것처럼 지각합니다. 저는 그 목소리들을 마치 어떤 사람이 아주 가까이에서 제게 말하는 것과 꼭 같이 다정스럽거나 분개한 목소리로, 유쾌하거나 슬픈 목소리로 느낍니다. 그런데 이 ‘제2의 목소리’는 반대로 제 영안에서 말하는 빛, 또는 직관 같은 것입니다. 제 영 ‘안’에서라고 했지 제 영 ‘에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노인 옆에서 몹시 열렬히 말하는 저명인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토론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에 가까이 갔을 때, 제 안에 있는 ‘제2의 목소리’가 ‘가믈리엘-힐렐’이라고 말했습니다. 예, 먼저 가믈리엘의 이름을 말하고 다음에 힐렐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생각해 보고 있는데, 그 내적 지도교사가 마침 가믈리엘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에 기분 나쁜 제 3의 인물을 제게 가리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리사이파 사람같이 보이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내적 지도교사는 제가 예수님 돌아가신 후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환상을 볼 때에는 이런 일이 매우 자주 있습니다. 이 내적 지도교사가 저 혼자서는 파악하지 못할 터인데,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어떤 세부사항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설명을 잘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게 말씀하기 시작하시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쯤으로 끝내겠습니다.





70. 성 요셉의 죽음

  별책, 정확히 말해서 현시대의 거짓 종교들에 대하여 받아쓴 것을 교정하고 있는 중인데, 명령조로 이 환상이 내 안으로 파고든다. 그래서 그 환상을 보면서 글을 쓴다.


  목공소 내부가 보인다. 벽 두 면은 자연 동굴을 이용하여 어떤 집의 방들을 만든 것처럼 암벽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모양을 한 것은 정확히 북쪽과 서쪽이고, 다른 두 벽, 즉 남쪽과 동쪽은 우리네 벽 모양으로 회반죽으로 발랐다.

  북쪽에는 바위를 타서 불완전한 아궁이를 하나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칠인지 아교인지가 들어 있는 솥이 하나 걸려 있다. 그 곳에 여러 해 동안 태워 온 나무로 인하여 벽이 어떻게나 까맣게 되었던지 꼭 타마유칠을 한 것 같다. 벽에 구멍을 하나 뚫고 그 위에 구부러진 투박한 기와 같은 것을 덮어놓은 것이 나무 탄 연기를 빨아들이는 굴뚝 역할을 하려고 해본다. 그러나 굴뚝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이다. 다른 벽들도 까맣게 되었고, 지금도 연기가 방안에 구름처럼 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예수가 어떤 목공 작업대에서 일하고 있다. 널빤지들을 대패질 하고 있는 중인데. 그 널빤지들을 뒤에 있는 벽에 기대어 세워 놓는다. 그런 다음 바이스의 물림장치에 물려 놓은 일종의 등 없는 의자를 붙잡고 물림장치에서 빼내어, 일이 제대로 되었는지 들여다보고, 직각자로 사방을 재본다. 그런 다음 아궁이로 가서 솥을 잡고 거기에 작은 막대기인지 붓인지 모를 것을 담근다. 밖으로 삐져나와 작은 막대기 같아 보이는 것 밖에 볼 수가 없다.

  예수의 옷은 연갈색이다. 속옷은 꽤 짧고, 소매는 팔꿈치 위로 걷어 올렸다. 앞에는 일종의 앞치마를 입었는데, 솥을 만졌을 때에는 손가락을 거기에 문지른다. 예수는 혼자 있다. 열심히 그러나 침착하게 일하고 있다. 아무런 무질서한 움직임도 없고 아무런 초조도 없다. 정확하고 자기 일에 전념한다. 어떤 일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는다. 잘 다듬어지지 않는 나무옹이에도, 작업대에서 두 번이나 떨어지는 나사돌리개(그런 것 같다)에도, 눈을 맵게 할 것이 틀림없는 연기에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이따금씩 머리를 들어 닫힌 문이 있는 남쪽 벽으로 눈길을 보내며 무엇을 엿듣는 것 같다. 어떤 때 앞으로 나아가 동쪽으로 향한 벽에 나 있고 거리에 면해 있는 문을 연다. 먼지가 많은 좁은 길 한 부분이 보인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러다가 일거리로 돌아온다. 침울하지는 않으나 근엄하다. 출입문을 다시 닫고 일하러 돌아간다.

  예수가 수레바퀴의 테를 이루는 조각 같은 것들을 만드는 데 골몰해 있는 동안 어머니가 들어온다. 남쪽에 있는 벽에 달린 문으로 해서 들어온다. 어머니는 매우 급하게 들어와서 예수에게로 달려간다. 짙은 하늘색 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같은 빛깔의 끈으로 허리를 졸라 맨 간단한 속옷이다.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아들을 부르며 비통한 애원의 몸짓으로 두 손을 예수의 한 팔에 올려놓는다. 예수는 그 팔을 어머니의 어깨에 얹으면서 어머니를 애무하고 위로하고 나서 일하던 것을 버리고 앞치마를 벗고 어머니와 같이 간다.

  나는 그대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도 알고 싶어 할 것으로 생각한다. 마리아 쪽에서 말이 별로 없었다. “아이고! 예수야! 와보아라, 아버지가 대단히 불편하시다!” 마리아는 이 말을 입술을 떨면서 피로하고 충혈된 눈에 반짝이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한다. 예수는 그저 “어머니!”하는 말밖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두 사람은 빛나는 녹음이 어우러진 작은 정원 쪽으로 난 문이 벙싯 열린 데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환한 옆방으로 들어간다. 정원에는 비둘기들이 빨래를 널어놓은 가운데로 날아 다닌다. 방은 초라하나 매우 정돈이 잘 되어 있다. 작은 요가 여러 장 깔린 작은 침대가 있다(작은 요라고 말한 것은 무엇인지 두껍고 부드러운 물건이지만, 우리네 침대와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위에 요셉이 베개 여러 개를 베고 누워 있다. 죽음이 임박하였다. 몹시 창백한 그의 얼굴과 흐릿한 눈과 헐떡거리는 가슴과 온몸이 축 늘어진 것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그의 왼쪽으로 가서 못 투성이이고 손톱까지 창백해진 손을 잡는다. 마리아는 그 손을 문지르고 쓰다듬고 입을 맞추며, 움푹 들어가는 관자노리에 반짝이는 줄을 이루는 땀과 눈꼬리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수건으로 닦는다. 그리고 흰 포도주 같은 액체를 적신 수건으로 입술을 적셔 준다.

  예수는 오른쪽에 가 선다. 그리고 착 까부라지는 몸을 민첩하고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베개 위에 바로 뉘어 놓는다. 예수는 임종하는 이의 이마를 쓰다듬어 깨어나게 하려고 애쓴다.

  마리아는 소리 내지 않고 아주 조용히 운다, 그러나 틀림없이 운다. 눈물 두 줄기가 창백한 뺨을 타고 짙은 하늘색 옷에까지 흘러내린다. 눈물은 반짝이는 청옥과 같다.

  요셉은 깨어나서 예수를 뚫어지게 올려다본다. 손을 예수에게 준다.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이 하느님과의 접촉으로 마지막 시련을 위한 힘을 얻으려는 것 같기도 하다. 예수는 그 손 위로 몸을 숙여 거기에 입을 맞춘다. 요셉은 미소를 짓는다. 그런 다음 고개를 돌려 마리아를 찾는다. 그리고 마리아에게도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마리아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미소를 지으려고 해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인다. 요셉은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순결하게 쓰다듬는데, 그것은 축복을 하는 것과 같다.

  들리는 것은 다만 비둘기들이 구구 하는 소리와 날아다니는 소리, 나뭇잎 살랑거리는 소리,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 그리고 방안에는 죽어가는 사람의 숨소리 뿐이다.

  예수는 침대를 돌아가 등 없는 의자를 들어 또 “어머니”라고만 말하면서 마리아를 앉힌다. 그런 다음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두 손으로 요셉의 손을 다시 잡는다. 이 장면은 어떻게나 진짜 같은지 마리아의 고통으로 인하여 내가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그런 다음 예수는 임종하는 이의 머리에 몸을 구부리고 시편 한 편을 요셉에게 속삭인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어떤 시편인지 말할 수가 없다.

  예수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여, 당신께 바랐사오니 나를 보호하소서‥‥.

  땅위에 있는 성인들을 위하여 주님은 내 모든 소원을 놀라우리만큼 들어주셨도다‥‥.

  나는 내게 당신 의견을 주시는 주님을 찬미하리로다.

  나는 항상 내 앞에 주님을 모시고 있으며, 주님은 내가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려고 내 오른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고 내 혀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내 육체도 바람 속에서 쉬리로다.

  그것은 당신이 내 영혼을 죽은 자들이 머무르는 곳에 버려두지 앉으실 것이고, 당신의 성인이 부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로소이다.

  당신은 생명의 길을 내게 알려주실 것이고, 당신 얼굴을 뵈옴으로 나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리이다.”

  요셉이 완전히 깨어났다. 더 생기 있는 눈길로 예수에게 미소를 보내며 예수의 손가락을 꼭 쥔다. 예수는 미소로 요셉의 미소에 응하고, 손가락을 꼭 쥐는 것에는 애무로 응한다. 예수는 양부의 아버지에게로 몸을 구부리고 조용히 계속한다.

  “주여, 당신의 장막은 얼마나 사랑스럽나이까!

  내 영혼은 주님의 안뜰에 가고 싶은 소원으로 다 타버리나이다.

  참새도 몸 담을 곳을 찾아내고, 멧비둘기도 새끼들을 기를 둥지를 찾아내나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제단을 원하나이다.

  당신 집에서 사는 이들은 복되옵니다‥‥당신에게서 힘을 얻는 사람은 복되옵니다. 그 사람은 눈물의 골짜기에서 그가 택한 곳으로 올라가도록 마음을 준비시켰나이다.

  오 주여,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오 하느님, 당신의 눈길을 돌려 당신의 그리스도를 보소서‥‥.”

  요셉은 흐느끼며 예수를 쳐다보고 축복을 하려는 듯이 입술을 움직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그가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예수에 대한 신뢰와 생기가 가득한 시선을 보이며 행복한다.

  “오 주여” 하고 예수는 계속한다.

  “당신은 당신 땅에 호의를 보이셨고. 야곱을 종살이에서 구해내셨나이다‥‥.

  주여.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보여 주시고 구세주를 보내 주소서.

  내 안에서 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를 원하나이다. 확실히 주 하느님은 당신의 성인들과 당신께로 향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 백성에게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시리로다.

  그러하도다. 그대의 건강은 가까이 왔고‥‥영광이 땅에서 살리로다‥‥인자와 진리가 서로 만났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었도다. 진리가 땅에서 일어났고, 정의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았도다.

  그러리로다, 주님이 당신 온정을 보여 주실 것이고, 우리의 땅이 열매를 맺으리로다. 정의가 주님 앞에서 걸어갈 것이고, 길에 그의 발자국을 남겨 놓으리로다.”

  “아버지, 아버지는 이 시간을 보셨고, 이 시간을 위하여 피로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이 시간이 오는 것을 도와주셨으니, 주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하고 예수는 요셉의 뺨에 천천히 흘러내리는 기쁨의 눈물을 닦으며 덧붙인다.

  그런 다음 다시 계속한다.

  “오 주여. 다윗과 그의 모든 관용을 기억하소서.

  다윗이 주께 그것을 맹세한 것과 같이, 나도 주를 위하여 한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고, 야곱의 하느님을 위하여 거처를 하나 발견하지 못하는 한‥‥ 쉬러 침대에 올라가지 않을 것이고, 내 눈에 잠을 주지 않고, 내 눈꺼풀에 휴식을 주지 않고, 내 영을 쉬게 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일어나시어, 당신의 휴식처로 오소서. 당신과 당신의 거룩한 계약의 궤가 될 곳으로, (마리아는 알아듣고 울음을 터뜨린다. )

  당신의 사제들이 정의의 옷을 입곡 당신의 성인들이 기뻐하게 하소서.

  당신의 종 다윗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당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숨기지 마시옵소서 .

  주께서 다윗에게 맹세로써 한 약속을 하셨으니, 주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리로다. <<나는 네 옥좌에 네게서 난 자손을 앉히겠노라.>>

  주님이 그를 당신 처소로 택하셨도다‥‥.

  나는 다윗의 권력을 활짝 피게 할 것이며, 내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을 붙인 횃불을 준비하리로다.”

  “아버지(성 요셉을 가리킴), 저와 어머니를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는 제게 의로운 아버지셨고, 영원하신 분은 아버지께 당신의 그리스도와 당신의 거룩한 계약의 궤를 지키는 소임을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리스도에게 불붙인 횃불이셨고, 거룩하게 된 태에서 난 아들에 대하여 사랑의 정을 가지셨었습니다. 아버지 평안히 가십시오. 아버지의 미망인은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제 어머니가 혼자 있지 않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아버지의 쉬실 곳으로 평안히 가십시오.”

  마리아는 차가워지는 요셉의 육체에 덮인 담요(꼭 겉옷같다)에 얼굴을 숙이고 울고 있다. 예수는 요셉의 숨이 약해지고 눈이 흐려지므로 서둘러 그에게 마지막 도움을 드린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복종하는 것만을 기뻐하는 사람은 복되도다‥‥.

  그의 올바름은 영원히 남아 있으리로다‥‥.

  올바른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비롭고 친절하고 올바른 그가 일어나는도다‥‥.

  의인의 기억은 영원하리로다‥‥그의 올바름은 영원하도다. 그의 힘은 영광이 되기까지 높아지리로다‥‥.”

  아버지는 이 영광을 가지실 것입니다. 저는 멀지 않아 아버지를 먼저 가신 성조들과 더불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으로 모셔 가려고 오겠습니다. 아버지의 영이 제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구원을 받으며 쉬고 있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도다.”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 그곳입니다.

  “그분은 사냥꾼들의 올가미와 악의를 품은 말에서 나를 구해 주셨도다.

  그분은 그 날개로 너를 덮어 주실 것이고, 그 깃 아래에서 너는 피난처를 얻으리로다.

  그분의 진리가 방패와 같이 너를 보호하리니, 너는 밤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로다‥‥.

  악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그분이 당신 천사들에게 명하시어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셨기 때문이로다.

  천사들은 너를 손으로 받들어 네 발이 조약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너는 살무사와 바실릭(basilic)*을 짓밟을 것이고 용과 사자를 밟아 으깨리로다.”

  아버지가 주님께 바라셨으므로 주님은 아버지를 해방하고 보호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주께 목소리를 올려보내셨으므로 주께서 들어주실 것이며, 아버지의 마지막 시련 때에 함께 계실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 세상에서부터 당신의 구원을 아버지께 보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 생명이 끝난 후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지금 아버지를 격려해 드리는 구원을 통하여 아버지를 후세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 구원은,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재빨리 와서 숭고한 포옹으로 아버지를 꼭 껴안고 모든 성조들의 앞장을 서서, 제게는 축복받은 아버지였던 하느님의 의인의 처소가 마련되어 있는 곳으로 모시고 갈 것입니다.

  저보다 앞서 가셔서 성조들에게 구원이 이 세상에 왔고, 오래지 않아 하늘나라의 문이 그들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시오.

  아버지, 떠나십시오. 제 축복이 아버지와 같이 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죽음의 구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요셉의 영에까지 이르게 하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말이 가까왔다. 노인은 이제 숨을 겨우 쉴 뿐이다.

  마리아는 그를 쓰다듬는다. 예수는 침대가에 앉는다. 예수는 죽어가는 요셉을 껴안고 끌어당기고, 요셉은 축 늘어지며 조용히 숨을 거둔다.

  이 장면에는 장엄한 평화가 가득차 있다. 예수는 노인을 다시 누이고, 이 최후의 순간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마음 고통을 안고 예수에게 가까이 왔던 마리아를 껴안는다.


*역주 : 사람을 보기만 해도 죽이는 힘을 가졌다고 하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뱀 이름.



71. “마리아는 요셉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격심한 고통을 겪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심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여자들에게 나는 예수와 협력하면서 그의 과부생활을 하는 마리아를 본받으라고 가르친다.

  마리아가 마음의 고통은 겪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고통을 겪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내 어머니 안에는 모든 것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게 겪었지만, 심하게 겪었다.

  그들 사이에는 정신적인 결합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편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꽤 미지근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역시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남편 요셉을 극진히 사랑하였다. 마리아는 30년간의 충실한 생활을 그에게 바쳤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아버지요, 남편이요, 오라버니요, 친구요, 보호자였다.

  이제 마리아는 그의 목숨이 매어져있던 포도나무 그루에서 잘라낸 포도나무 가지 모양 외로움을 느꼈다. 그의 집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이제 마리아는 헤어지는 것이었다. 전에는 집안 식구들이 서로 의지하는 단일체였다. 그런데 지금은 주요한 벽이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이 가정에 가해진 첫번째 타격이었고, 지극히 사랑하는 예수와의 아주 임박한 이별의 예고였다. 마리아가 아내와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셨던 영원하신 분이 이제는 그에게 과부생활과 아들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시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숭고한 ‘예’라는 대답중의 하나를 한다.

  “예, 주님,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 힘을 얻기 위하여 내게 바싹 다가온다. 마리아는 그의 생애의 가장 중대한 시간에 항상 하느님께 바싹 다가갔다. 성전에서 결혼하라고 부름을 받았을 때, 나자렛에서 어머니가 되라고 부름을 받았을 때, 역시 나자렛에서 과부의 처지에서 오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자렛에서 아들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당하면서, 골고타에서 내 죽음을 보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렇게 하였다.

  우는 너희들, 죽는 너희들, 죽을 몸으로 사는 너희들은 이 교훈을 받아라. 내가 요셉에게 한 말을 들을 자격을 얻도록 힘써라. 그 말들이 너희 임종 때에 너희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 죽는 너희들은 예수가 너희 곁에 와서 너희를 격려해 주게 할 자격을 얻기 위하여 이 교훈을 기억해 두어라. 그리고 그럴 자격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감히 나를 너희 곁으로 부르도록 하여라. 내가 오마. 손에는 은총과 위안을 잔뜩 들고, 용서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마음으로, 입으로는 사죄와 격려의 말을 하면서 오마.

  죽음이 너희가 내 품에 있을 때에 찾아오면 격렬함을 모두 잃고 만다. 이 말을 믿어라, 내가 죽음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를 신뢰하면서 죽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즐거운 것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가 너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 말을 하였다. ‘주여, 제 영을 당신께 맡기나이다’하고, 그리스도 그의 임종 때에 너희들의 임종과 공포와 그르침과 걱정과 용서 받고자 하는 너희들의 소원을 생각하면서 그 말을 하였다. 그리스도는 창이 심장을 꿰뚫기 전에, 육체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찢어지는 듯한 가슴을 안고, 이 말을 하였다. 그것은 그를 생각하면서 죽는 사람들의 임종의 고통이 주님에 의하여 완화되고, 영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고통에서 영원한 기쁨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요한(마리아 발또르따)아, 이것이 오늘의 교훈이다. 착하게 살아라. 그리고 걱정하지 말아라. 내 평화가 내 담화와 묵상을 통하여 네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갈 것이다. 예수의 가슴을 베개 삼고 마리아를 간호원으로 둔 요셉의 입장이 되어라. 요람에 들어 있는 아기와 같이 우리 사이에서 쉬어라.




25. 성령 강림

최후의 만찬의 집에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제자들도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이 집의 다른 여러 방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최후의 만찬실에 열 두 삳ㅗ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서 모여 있고, 목소리가 들린다.

가구들을 달리 배치하여 방 한가운데와 벽 두 군데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방이 넓어 보인다. 최후의 만찬에 쓰인 식탁을 셋째 벽에 밀어다 붙였고, 사도들과 벽들 사이에 최후의 만찬에 쓰인 와상(臥床)들과 예수께서 사도들의 발을 씻으실 때 쓰신 등없는 걸상을 놓았다. 그러나 그 와상들은 최후의 만찬때 모양으로 식탁과 직각이 되게 놓지 않고, 식탁과 평행이 되게 놓아서, 사도들이 와상을 전부 다 차지하지 않고서도 앉을 수 있게 하였다. 다만 한 와상만은 식탁과 수직이 되게 놓아서, 최후의 만찬 때에 에수께서 앉으셨던 자리인 식탁 가운데에 계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한 분이 와상 하나를 전부 쓰시게 하였다.

식탁에는 식탁보도 없고 식기도 없고, 찬장도 속이 비었고 벽에도 장식이 없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큰 촛대에만 불꽃 하나만 있는 불이 켜져 있고, 이상한 큰 촛대의 꽃부림처럼 빙 둘러 있는 작은 등들은 꺼져 있다.

창들은 닫혀 있고 무거운 쇠빗장을 가로질러 놓았다. 그러나 햇살 하나가 작은 구멍으로 대담하게 새어 들어와 길고 가는 바늘처럼 방바닥에까지 내려와 환한 반ㄴ점을 만들어 놓는다.

성모님은 당신 자리에 혼자 앉아 계시고, 그 옆자리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앉아 있는데, 베드로는 오른쪽에, 요한은 왼쪽에 있다. 새 사도 마티아는 알패오의 야보고와 타대오 사이에 있다. 성모님 앞에는 짙은 빛깔의 넓고 낮은 나무궤가 하나 이는데 닫혀 있다.

성모님은 짙은 파란색 옷을 입고 계시다. 머리에는 흰 베일을 쓰고 계신데, 그것이 겉옷 한자락 위에 걸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맨 머리이다.

성모님은 큰 소리로 천천히 읽으신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불빛이 거기까지에는 별로 가지 않기 때문에, 펴 가지고 계신 두루마리에 씌어 있는 말들을 읽기보다는 외시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말없이 묵상을 하며 성모님의 읽으시는 것을 따라가다가 가끔 필요한 때에는 응답을 한다.

성모님은 황홀한 미소로 얼굴이 환하게 변하였다. 성모님이 무엇을 보시는지, 그분의 눈을 밝은 두별같이 반짝이게 하고, 마치 장미� 불꽃이 그 위에 반사되는 것처럼 그분의 상아빛 뺨이 불그레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성모님은 참으로 신비로운 장미이시다.

성모님이 아주 부드럽게 미소지으시고 읽으시는 동안, 사도들은 그분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약간 숙이다. 섬모님의 목소리는 천사의 노래와도 같다. 베드로는 얼마나 감격하였는지 굵은 눈물 두 줄기가 눈에서 흘러 내려 코 양쪽에 파진 주름으로 해서 반백이 된 더부룩한 수염속으로 내려가 사라진다. 그러나 요한은 성모님의 순결한 미소를 반사시키고, 두루마라를 읽으시는 성모님을 지켜보면서 그분과 같이 사랑이 타오르며, 성모님께 또 다른 두루마리를 드릴 때 그분을 쳐다보고 미소 짓는다.

독서가 끝났다. 성모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펴졌다가 다시 감기는 양피지의 희미한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성모님은 양손을  자로 가슴에 포개 얹으시고 궤에 머리를 의지하시고 정신을 가다듬고 묵상기도를 하신다. 사도들도 따라 그렇게 한다…

갑자기 바람소리와 하프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의 노래와 완전한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같기도 한 매우 힘차고 듣기 좋은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아침의 정적 속에 울려 퍼진다. 그 우르릉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듣기 좋고 더 힘차게 가까이 들려와서, 그 진동으로 땅을 가득 채우고, 그 진동을 퍼뜨려 집과 벽과 가구에 미치게 한다. 그 때까지는 문이 닫힌 고요한 방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큰 촛대의 불꽃이 마치 바람에 둘러싸인 것처럼 펄럭이고, 등잔의 작은 사슬들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초자연적인 음파로 진동하여 댕그랑 소리를 낸다.

사도들은 겁에 질려 머리를 든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에 주신 가장 아름다운 모든 음을 가진 힘차고 매우 아름다운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오는데, 어떤 사람들은 도망칠 차비를 하면서 일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손과 겉옷으로 머리를 가리고, 또 주님께 용서를 청하기 위하여 가슴을 치며 방바닥에 몸을 움츠린다. 도 어떤 사람들은 지극히 순결하신 분께 대하여 항상 가졌던 조심성을 그대로 가자지 못할 만큼 너무 겁에 질려 성모님 곁으로 바싹 달려든다. 요한만이 겁을 내지 않는다. 그것은 성모님의 얼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쁨의 빛나는 평화를 보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당신만이 아시는 어떤 것을 보고 미소지으시며 고개를 쳐드신다. 그런 다음 팔을 벌리고 무릎을 꿇으신다. 이렇게 벌려진 겉옷의 자락이 파란 두 날개 같이, 성모님을 따라 무릎을 꿇은 베드로와 요한 위에 펼쳐진다. 그러나 내가 묘사하기 위하여 간직한 이 모든 것이 일분도 안되는 동안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빛, 불, 성령께서 나타나신다. 성령께서는 마지막으로 듣기 좋은 소리를 내시며 문과 창을 움직이지 않으신 채 닫혀 있는 방 안으로 빛나고 활활타는 공의 형태로 들어오셔서, 이제는 베일이 없는 성모님의 머리 위 20센티미터쯤 되는 곳에 잠시 빙빙 도신다. 성모님의 머리에 베일이 없는 것은 성령의 불을 보시고 성령께 기도하시려는 듯이 양팔을 올리시고, 기쁜 환호성을 올리시고, 한없는 사랑의 미소를 지으시며 고개를 뒤로 젖히셨기 대문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 전체가, 사랑 전체가 당신 정배의 머리 위에 집중되셨던 순간이 지난 뒤에는, 지극히 거룩하신 구체(球體)가 듣기 좋고 대단히 빛나는 열세 개의 불꽃으로 나뉘어 각 사도의 이마에 살짝 와 닿으시는데, 그 빛은 이 세상의 어떤 비유로도 묘사할 수 가 없다.

그러나 성모님 위에 내려오는 불꽃은 그 이마 위에 멎어서 살짝 와 닿는 불꽃이 아니라, 그 순결한 머리를 왕관처럼 둘러사는 관과 같다. 그 왕관은  하느님의 딸이요, 어머니요, 정배이신 분, 변하지 않는 동정녀, 지극히 아름다우시고 영원히 사랑받으시는 영원한 딸, 아무 것도 어떤 일에서도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는 분, 고통으로 인하여 나이 들어 보였었으나 부활의 기쁨 속에 소생하시어, 아들과 더불어 살과 눈길과 생기의 아름다움과 생생함을 더하게 되신 분… 하늘에 올라가서 낙원의 꽃이 될 영광스러운 당신 육체의 아름다움을 벌써 미리 맛보시는 분의 머리에 씌워진 것이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불꽃을 사랑하시는 분의 머리둘레에서 빛나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성모님께 무슨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비밀이다! 성모님의 복된 얼굴은 초자연적인 기쁨으로 환하게 변모하였고, 세라핌의 미소 같은 웃음을 웃는데, 그 동안 성령의 빛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에 금강석같이 보이는 복된 눈물이 복되신 성모님의 뺨을 타고 흘러 내린다.

불은 얼마동안 이렇게 머물러 있다. …그러다가 사라진다. …빛이 내려왔던 기념처럼 향기가 남아 있는데, 이 세상의 어떤 꽃도 낼 수 없는 향기이다. …천국의 향기이다…

사도들은 정신이 돌아왔다….

성모님은 넋을 잃은 채로 계시다. …성모님은 다만 팔을 가슴 위에 자로 포개시고,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신다. …성모님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계속하시며… 모든 것에 무감각하시다….

아무도 감히 성모님을 방해하지 못한다.

요한은 성모님을 가리키며 말한다. "어머니는 제단이셔, 그래서 그 영광에 주님의 영광이 내려앉으신 거야…."

"맞아, 어머니의 기쁨을 방해하지 마세. 그러지 말고 가서 주님을 전해서 백성들에게 주님의 행적과 말씀을 알리도록 하세" 하고 베드로가 초자연적인 충동으로 말한다.

"가세! 가! 하느님의 성령께서 내 안에서 불타고 계시네" 하고 알패오의 야보고가 말한다.

"그리고 행동하라고 격려하시네. 우리 모두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세."

그들은 마치 바람이나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떼밀리거나 끌어당겨지는 듯이 밖으로 나간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들에게 불러준 작품이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을 너희들은 한 인간이 나와 너희들을 위하여 가졌던 사랑 때문에 받은 것이다.

작품은 오늘 끝을 맺는다. 이 룩가의 교회에서 애덕으로 주를 섬긴 비천한 여종인 룩가의 성녀 지따의 기념일인 오늘, 나는 성녀 지따와 같은 애덕과 사랑으로 모든 불행한 사람을 위하여 내게 봉사하라고 내 작은 요한을 먼 곳에서 이곳으로 데려왔다. 지따는 내가 가난한 사람 하나하나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자기의 빵을 주었다. 그런데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사람들은 내 곁에서 지극히 행복하게 될 것이다.

마리아 - 요한은 믿음에 관해서 무지나 냉담이나 의심 속에서 번민하는 사람들에게 내 말을 전해 주었다. 하느님을 알게 하려고, 수고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이신 하느님을 많은 사람에게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영원세계에서 별들 같이 빛날 것이라고 지혜이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은 꽃부리가 아직 봉오리로 있을 때에 대가 꺽인 마리아 데레사 고레띠라는 들판의 순결한 백합꽃을 교회가 제대에 올리는 날인 오늘 끝내기로 한다. 그런데 이 백합꽃은 옛날 천사이던 때의 그의 모습보다도 더 찬란한 저 순진함을 샘낸 사탄이 꺾지 않고 누가 꺾었겠느냐? 하느님이신 그의 사랑하는 이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꺾인 것이다. 마리아는 추악한 이 세기의 동정녀요 순교자이다. 이 추악한 세기에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성령의 행동으로 사람이 되신 당신의 말씀에게 침범되지 않은 거처를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부인하기 위하여 뱀과 침과 같은 침을 뱉으면서 복되신 여인의 명예까지도 사람들이 업신여긴다. 마리아 - 요한도 사탄에게서 수많은 희생물을 빼앗아 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인 작품으로 내 경탄할 일들을  찬양하는 것을 원치 않는 증오 자체인 사탄의 희생물이다. 그러나 마리아 - 요한은 마리아 데레사가 알았던 것과 같이 순교는 어떻게 불리거나 어떤 모양을 하고 있거나, 내 수난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을 즉시 열어주는 열쇠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작품은 끝났다

그리고 성신강림과 더불어 이 작품이 끝나면서 내 지헤가 그 새벽인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에서부터 그 황혼인 성신강림까지 비추어 준 메시아의 과정(過程)이 마감되었다. 메시아의 전과정은 잘 볼 줄아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성령의 사업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과정은 사랑의 정배의 원죄 없는 잉태의 신비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성령의 불로 된 도장이 찍히는 것으로 끝막아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느님의. 하느님의 사랑의 명백한 사업은 성신강림과 더불어 끝을 맺는다. 그 때부터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에게서 내려오는 로마 교회안에 결합해 있는 신자들 안에서 하느님의 내적이고 신비로운 일이 계속된다. 그리고 교회, 즉 목자들과 양들과 어린 양들로 이루어진 신자들의 집합체는 신학자 중의 신학자이신 사랑이신 성령의 끊임없는 영적 지도의 덕택으로 방황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다. 하느님께 몰두하고 자기들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 즉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로 그들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진짜 신학자들, 바오로의 사상에 따른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들' 인 진짜 신학자를 육성하시는 신학자중의 신학자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 끝에는 복음 전파하던 시절의 해가 끝날 때마다 넣은 탄식을 또 한 번 넣어야 하겠다. 그리고 내 선물을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것을 보는 고통으로 너희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너희들은 내가 주는 것을 받아들일 줄을 몰랐으므로 다른 것을 받지 못할 것이다'하고. 그리고 지난 여름(46년 5월 21일)에 너희들을  바른 길로 도로 데려오기 위하여 너희들에게 전하게 한 말을, 즉 '너희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고 말하는 날이 오기 전에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또 다시 말하는 바이다."

작품은 오늘 1947년 4월 27일에 끝났다.

비아렛지오- 프라띠로 113번지- 마리아 발또르따.




 38. 작품을 끝내며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작은 요한에게 삽화와 말을 명확히 해주고 받아쓰게 한 이유는 이 희생자이고 사랑하는 영혼에게 내게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전해 주는 기쁨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중심은 가르치고 싸우는 교회(지상의 교회)에 대한 내 사랑과 영혼들이 완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돕고자 하는 갈망이다. 나를 아는 것은 올라가는데 도움이 된다. 내 말은 생명이다.


주요한 이유들을 말하겠다.


1. 1947년 1월 18일에 받아쓰라고 불러 줄 때에 내가 말해준 이유들을 작은 요한은 여기에 전부 써놓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것은 너희들이 멸망할 참인데, 나는 너희들을 구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선물로 주는 가장 심각한 이유는 내 대리자 비오 10세에 의하여 단죄된 현대주의(modernisme)가 타락하여 점점 더 해로운 사상들이 생겨나게 하는 이 시대에, 내 대리자로 대표되는 거룩한 교회가 아래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을 논박하기 위한 더 많은 수단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부인하는 것은 이런 점들이다.


- 교리의 초자연적 성격, 그리스도의 천주성, 믿음과 역사(복음서, 사도행전, 사도들의 편지, 성전)로 우리에게 전해진 실제적이고 완전한 하느님이요 사람인 그리스도의 진실성,

- 내가 말로 가르친 내 참 교리와 같은 바울로와 요한과 니체아, 에페소, 칼체돈 공의회의 가르침,

- 하느님의 것이고 완전하기 때문에 한없는 내 지식,

-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에게서 내려오는 교회의 교리와 성사의 기원이 하느님께 있는 것

- 내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준 복음이 보편적이고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되리라는 것,

- 처음부터 내 교리가 완전하였다는 성질, 계속적인 변화를 거쳐 지금과 같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그대로라는 것, 즉 그리스도의 교리, 은총의 시기의 교리, 하늘나라의 교리, 너희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의 교리, 하느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이라는 점,

- 머리가 일곱 달리고 뿔 열 개를 가지고 머리에 일곱 개의 왕관을 쓰고,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아래로 내동댕이치고 -그런데 내 진정으로 말한다마는 그 별들은 땅보다도 훨씬 아래쪽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여인을 괴롭히는 붉은 용에게, 그리고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경탄할만한 일들에 매혹되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숭배하는 바다와 땅의 짐승들에게, 지금까지 덮여있던 책장들까지도 활짝 편 영원한 복음서를 들고 하늘 가운데로 날아 다니는 천사를 대립시켜라. 이것은 사람들이 그 빛의 덕택으로 그들을 그의 어둠 속으로 쳐 넣고자하는 아가리 일곱이 달린 큰 뱀의 나층(螺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돌아왔을 때 끝까지 항구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 믿음과 사랑을 얻어 만나게 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사탄과 사람들의 일로 인하여 그렇게 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보다도 더 많게 하여라.


2. 사제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복음서와 그리스도에게 관계되는 모든 것에 대한 강한 사랑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어머니에 대한 새롭게된 사랑이다. 어머니의 기도에 세상의 구원의 비밀이 들어 있다. 저주받은 용을 이긴 여인은 내 어머니다. 내 어머니에 대한 새로워진 사랑과 어머니의 대한 새로워진 믿음과 거기에 관계되는 지식으로 어머니의 능력을 도와 드려라. 마리아가 세상에 구세주를 주었고, 또 마리아에게서 세상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3. 영적인 선생들과 영혼의 지도자들에게 내 주위에서 살았던 여러 가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사용했던 여러 가지 방식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돕는 것.

사실 모든 사람에게 오직 한가지 방법만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자발적으로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의인을 끄는 방법이 다르고, 믿기는 하지만 죄인인 사람에게 써야 할 방법이 다르고, 이교도에게 써야 할 방법이 다르다. 너희들의 선생이 이교도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이 너희들이 어떤 사람들을 이교도라고 판단하게 된다면 , 이교도가 너희들 가운데 얼마든지 있다. 참 하느님을 권력과 힘의 우상이나 황금이나 음란이나 그들의지식의 교만이라는 우상으로 바꾼 불쌍한 사람들이 이교도이다. 또 현대판 개종자들, 즉 그리스도의 사상은 받아들이면서도 분리된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해 있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써야 할 방법도 다르다. 아무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그 어느 다른 양들보다도 이 길잃은 양들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 그들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인 양의 우리로 다시 데려오도록 힘써 목자 예수의 소원이 채워지게 하여라.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로마인들이나 그리스인들과 접촉을 가지셨다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거나 복음사가들이 그들의 깨뜨릴 수 없는 히브리인의 정신상태 때문에 그들이 찬성하지 않던 삽화들에 대하여 드리웠던 침묵의 두꺼운 장막 뒤에 겨우 비쳐보이는 사실이 얼마나 많으냐! 너희들은 내가 한 일을 다 안다고 생각하느냐?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들이 내 공생활에 대한 이 설명을 읽고 받아들인 후에도 내게 대하여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만일 내가 작은 요한에게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전해 주라고 모든 것을 알게 했더라면, 내가 임무를 행한 모든 날들과 그날들 하루하루에 행한 모든 행동을 기록하는 피로로 인하여 그를 죽게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요한은 말한다. 과장법은 별도로 치고 너희들에게 진정으로 말하지만, 내 개별적인 모든 행동, 내 개별적인 모든 가르침, 영혼 하나를 구하기 위한 내 보속과 기도를 써야 했더라면, 내게 대하여 말하는 책들을 두기 위하여는 너희들의 도서관 중의 하나, 가장 큰 도서관 중의 하나의 큰 방 여럿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또 진정으로 말하지만, 내게 대한 일을 별로 알지 못하고, 그래서 거의 언제나 부도덕과 이단으로 더럽혀진 저 인쇄물들을 그토록 좋아하기보다는 저 많은 먼지 앉고 불건전한 쓸 데 없는 지식을 불에 던져버리고 그 대신 내 책들을 갖다 놓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4. 살과 피로는 진짜 아담의 후손인, 그러나 죄없는 아담의 후손인 사람의 아들과 마리아의 모습의 그 진실성을 들려주는 것. 만일 첫째 조상들이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의 완전한 인간성 - 사람이라는 뜻, 즉 그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영적인 성질과 물질적인 성질, 이 두 가지 성질이 있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자손들은 우리와 같았을 것이다. 감각은 완전하였을 것이다. 즉 대단히 예민한데도 불구하고 이성에 복종하였을 것이다. 감각이라는 말로 나는 육체적인 감각과 더불어 정신적인 감각도 가리킨다. 관능성으로 결합되지 않고 정신적인 사랑의 유대로 결합된 남편에 대해서나, 자기에게서 태어난 자식에 대한 완전한 여인의 완전을 가지고 온전히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서나 온전한 사랑, 즉 완전한 사랑을 가졌을 것이다. 하와도 이와 같이 마리아처럼 사랑해야 되었을 것이다. 즉 자식이 가져다주는 육체적인 향락 때문에가 아니라 그 아들이 창조주의 아들이고 인류를 번식시키라는 창조주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했어야 했다.

또한 마리아는 자기의 아들이 상징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완전히 믿는 여인의 온갖 열정으로 사랑하였다. 예수에게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너무 다정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겠다. 마리아는 죄없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하느님과 부모와 남편과 아들과 이웃에 대한 그의 사랑에 결함이 없었다. 또 어머니가 나를 그의 태중에서 나온 아들로 보는 것 외에 또 무엇으로 보는 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겠다. 끝으로 마리아의 국적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겠다. 히브리 민족, 동방 민족이었고, 그것도 지금 시대보다 매우 멀리 떨어진 시대의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소에서 너희들에게는 과장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랑을 과장하는 어떤 말에 대한 설명이 나오게 된다. 보통 말에 있어서까지도 화려하고 장중한 어투가 동방의 어투, 히브리인들의 어투이다. 그 시대에 쓰여진 이 민족의 모든 글이 이것을 증명하며, 세월이 흘렀는데도 동방의 말투는 많이 변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20세기가 지난 지금, 생활의 퇴폐가 이렇게 큰 사랑을 죽인 이 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너희들 시대의 냉담하고 경박한 여자 같은 나자렛의 마리아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겠느냐?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있으며, 온순하고 깨끗하고 다정스러운 이스라엘의 딸, 하느님의 정배, 하느님의 동정녀인 어머니를 너희들의 시대의 지나치게 병적으로 흥분한 여자나 냉랭하게 이기적인 여자로 바꿀 수는 없다.

마리아에게 대한 예수의 사랑을 너무 다정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예수 안에는 하느님이 계셨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를 대신하여 고통으로 당신께 갚는 여인인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데에서 위안을 받으셨다고. 인류를 대신하여 고통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돌아오셔서 그것을 자랑으로 삼으실 수 있게 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주민들을 마련해 드리는 방법이다. 끝으로 어떤 사랑이든지 질서를 어길 때, 즉 하느님의 뜻과 지켜야 할 의무를 어길 때에, 또 그 때에만 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말하겠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아라. 마리아의 사랑이 이렇게 하였는가? 내 사랑이 그렇게 하였는가? 마리아는 내가 하느님의 뜻을 모두 행하는 것을 이기적인 사랑으로 막았는가? 혹 내가 어머니에 대한 도를 지나친 사랑으로 내 사명을 포기하였는가?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내 사랑도 오직 한 가지 소원밖에 없었다. 즉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모든 작별 인사를 하였고, 아들도 어머니에게 모든 작별인사를 하였다. 고통으로 인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끼는 우리의 인성과 상하는 것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아들을 공공연한 가르침의 십자가와 갈바리아의 십자가에 내주면서 그렇게 하였고, 아들은 어머니가 공동 속죄자가 되도록 고독과 애를 끊는 듯한 괴로움에 어머니를 내맡기면서 그렇게 하였다. 이것이 마음약함이냐? 감상적인 태도냐? 사랑할 줄을 알지 못하고, 사랑과 사랑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된 사람들아, 이것은 완전한 사랑이다.

또 이 저서는 어떤 복잡한 일련의 상황의 어둠으로 덮여 밝은 복음서의 그림에 어두운 부분을 만들어놓는 것 같은 점들과 급격한 변화 같아서 이 삽화에서 저 삽화로 건너가면서 이해하기 어렵게만 되는 점들을 명확히 해주는 것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점들인데, 이런 점들을 해명해야 조성된 어떤 상황과 내가 쓸 수밖에 없었던 어떤 강한 방식과 완고해서 어떤 방법으로도 회개시킬 수 없는 적대자들에 대한 어떤 엄격함을 정확히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아내게 된다. 이러한 방식들은 용서하고 온화하고 겸손하라고 하던 끊임없는 내 권고와는 너무도 대조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 모두는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모든 자비를 쓰신 다음에는, 당신의 인자 때문에 당신의 참을성을 남용하고 당신을 시험해도 괜찮다고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명예를 위하여 ‘그만 해둬라’하고 말씀할 줄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하느님을 조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지혜로운 말이다.


5. 복잡하고 오래 계속된 내 수난을 정확히 알리는 것. 내 오랜 수난은 몇시간 동안에 완수된 피흐르는 수난으로 절정에 이르렀지만,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된 매일매일의 고통으로 나를 들볶았고, 점점 더 커졌다. 또 내 수난과 더불어 똑같은 기간 동안 심장이 고통의 칼에 꿰뚫린 내 어머니의 수난도 정확히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앎으로 인하여 너희들도 우리를 더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6. 내 말의 힘과 내 말을 받는 사람이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느냐 또는 결코 올바르지 않은 관능적인 뜻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도들과 유다, 이것이 상반되는 두 가지 본보기이다. 사도들은 대단히 불완전하고, 촌스럽고, 무식하고 과격하였다. 그러나 착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유다는 사도들의 대부분보다 더 유식하고 수도와 성전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련되었었다. 그러나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들이 선으로 발전하고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아라. 그리고 악으로 발전하고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아라.

특히 정신적인 통찰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무겁고 어두운 세력에 대한 어려운, 대단히 어려운 싸움으로 성덕에 이르는 사람을 정열이 없고 감정의 움직임이 없는, 따라서 공로가 없는 부자연스러운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성인들의 실체를 곡해하는 사람들은 착한 열한 사도의 완전을 향한 발전을 지켜보기 바란다. 공로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덕택으로 억제하는 도를 지나친 열정과 유혹에 대한 승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열정과 유혹을 억제 하는 것은 영원히 하느님을 누린다는 최후의 목적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회개의 기적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오게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지켜보기 바란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기 위한 방법은 주신다. 그러나 사람의 자유를 억제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사람 자신이 회개하기를 원치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회개하는 데 소용이 되는 것을 가지고도 쓸 데 없는 일이다.

내 말의 여러 가지 결과를 검토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사람에게 미치는 결과도 지켜보기 바란다. 영적인 사람뿐 아니라 인간적인 사람에게도 미치는 결과를. 착한 뜻으로 받아들인 내 말은 그들을 외적인 완전과 내적인 완전으로 이끌어감으로 양쪽을 다 변화시킨다.

그들의 무식과 내 겸손으로 인하여 사도들은 사람의 아들을 지나치게 허물없이 대하였고 - 그들 가운데 있는 착한 선생이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리 부담없이 굴어도 괜찮은 겸손하고 참을성 있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는 존경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식해서 그런 것이었다. 따라서 용서할 만한 것이었다 - 자기들끼리 잘 다투고, 이기적이고, 그들의 사랑과 내 사랑에 대하여 질투하고, 백성들을 대할 때 참을성이 없고 ‘사도'이기 때문에 좀 교만하고, 깜짝 놀라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군중에게 보여 주는 이상한 일을 하려고 몹시 걱정하였는데,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새 사람으로 변하여, 처음에는 나를 본받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정열을 억제하였고, 그 다음에는 점점 더 나의 참된 자아를 알게 되었고, 나를 하느님인 주님으로 보고 사랑하고 대우할 정도로 그들의 태도와 그들의 사랑을 바꾸었다. 혹 그들이 내 지상 생애가 끝날 무렵에도 아직 처음 시기의 경박하고 유쾌한 친구들이었느냐? 특히 부활한 뒤로 사람의 아들을 친구로 취급하는 친구들이었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은 우선 왕의 대신들이고, 그 다음에는 하느님의 사제들이다. 모두가 다르고, 완전히 변하였다.

묘사된 대로의 사도들의 성질을 거칠다고 생각하고 반자연적이라고 판단할 사람들은 이것을 고려하기 바란다. 나는 까다로운 박사도 아니었고 교만한 왕도 아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선생도 아니었다. 나는 관대할 줄을 알았다.

나는 흔히 내 지식의 향기를 잃은 그들의 지식을 뽐내는 선생들을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하여 거친 재료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육성하고자 하였고, 갖가지 빈 그릇에 완전을 가득 채워서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 돌로 아브라함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을 만들어내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가지고 선생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7. 끝으로 유다의 수수께끼를 너희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많이 베풀어 주신 한 영의 타락이라는 그 수수께끼를. 이 수수께끼가 사실은 너무나 자주 되풀이 되고 너희들의 예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종과 아들이던 것이 마귀로 변하고 은총을 죽임으로써 하느님을 죽이는 사람이 되는지를 너희들에게 알게 하여 너희들이 구렁으로 떨어지는 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구렁을 향하여 가는 어린양들을 말리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지능을 기울려 유다의 소름끼치는, 또한 그러나 흔한 모습을 연구하여라. 너희들이 이러저러한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또 싸워야 하는 모든 중대한 죄종(罪宗)이 뱀들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그 모습을. 이것이 너희들이 특히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이것이 영적인 선생과 영혼의 지도자로서 너희들의 성직 수행에 있어서 너희들에게 가장 유익한 교훈이겠기 때문이다. 어떤 생활 상태에서나 자기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영원한 죽음을 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일곱 부분이 있는 것과 같이 일곱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일곱 부분은,

1. 복음준비 (평생 동정인 마리아의 티없는 잉태부터 성 요셉의 죽음까지)

2. 공생활의 첫 해

3. 공생활의 둘째 해

4. 공생활의 셋째 해

5. 수난준비 (데벳에서 니산까지, 즉 라자로의 임종의 고통에서부터 베다니아의 만찬까지)

6. 수난 (라자로와의 작별에서 내가 무덤에 묻히는 것, 그리고 부활날 새벽까지)

7. 부활에서 성령강림까지


내가 일러 주는 것과 같이 여러 부분을 이렇게 나누는 것을 따라야 한다. 이 구분이 옳은 것들이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들 하겠느냐? 너희들의 선생인 나에게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희들은 내게 말을 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마음 속으로 말을 하고, 또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작은 요한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너희들을 내가 너희들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그 정의를 가지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너희들의 동료이고 하느님의 연장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랑을 짓밟음으로 작은 요한에게 고통을 주기 위하여 그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진정으로 말하지만, 내 연장이 된다는 것은 걱정이 없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피로와 노력이고, 모든 일에 있어서 고통이다. 세상은 그가 선생에게 준 것, 즉 고통을 선생의 제자들에게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사제들, 특히 동료들이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이 작은 순교자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마음 속으로 너희들 자신에게 말할 때에 교만과 질투와 불신과 그밖에 여러 가지 불평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의 불평과 너희들의 분개한 놀람에 대하여 해답을 주겠다.

최후의 만찬을 먹던 저녁에 나는 나를 사랑하던 열한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위로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다시 일깨워 주실 것이다.' 내가 말할 때에 내 머리로는 그 곳에 있던 제자들 외에 영과 진리와 그렇게 하고자 하는 뜻으로 내 제자가 될 사람들도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벌써 당신의 은총으로 너희들에게 하느님을 기억하는 능력을 넣어주시는 성령께서는 영혼들을 원죄로 인한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끌어내고 영적인 시각과 지식을 누리라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영들의 통찰력을 아담의 비참한 유산 때문에 둘러싸고 있는 어두움에서 구해 내심으로써, 내가 말한 것을 당신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들의 마음에 ‘다시 일깨우심으로’ 스승으로서의 당신의 일을 완성하신다. 이것이 복음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일깨운다는 것은 그 정신을 비춘다는 말이다. 만일 복음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말씀을 상기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인 복음의 정신은 사랑으로써, 즉 성령으로써 이해하게 할 수 있다. 성령이 복음서의 참다운 저자이신 것과 같이 복음서의 유일한 주석자도 되신다. 그것은 어떤 작품의 저자만이 그 작품의 정신을 알고, 작품을 읽는 사람에게 그 정신을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이해는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완전은 어느 것이나 결함이 많기 때문에 인간인 저자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완전하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신 성령께서는 하실 수 있다. 사실 복음서의 저자이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혼 안에 그것을 다시 일깨우고 해설하고 보충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 (요한 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요한 16:13-15)

그 다음 성령이 복음서의 참다운 저자이신 만큼, 왜 이 작품에 있는 말, 그리고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끝마치는 말로 그렇게 되었다고 이해시킨 그것을 상기시키지 않으셨느냐고 반론을 제기하면,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고 그 생각은 항상 옳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또, 만일 너희들이 계시는 마지막 사도와 더불어 마감되었고, 그 사도가 묵시록에서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22:18)하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제는 덧붙일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또 이 말은 요한의 묵시록이 마지막 끝마무리가 되는 계시 전체에 대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이 작품으로 계시에 덧붙인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자연적인 원인과 초자연적인 뜻으로 인하여 생긴 빈틈들을 메웠다고 말하겠다. 또 마치 모자이크에 그 완전한 아름다움을 돌려주기 위하여 손상되었거나 빠져나간 돌들을 다시 끼워서 모자이크를 보수하는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이 내가 내 숭고한 사랑의 그림을 복구하고 싶다면, 그리고 이것을 인류가 어둠과 공포의 구렁으로 뛰어드는 이 세기에 하려고 지금까지 보류했었다면, 내게 이렇게 못하게 막을 수가 있겠느냐?

하늘의 빛과 목소리와 권유에 대하여 정신이 하도 흐려지고 귀머거리가 되고 약해진 너희들이 혹 이런 것이 필요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정말이지 너희들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지마는 이제는 너희 구세주를 ‘보는’데에 충분하지 못하게 된 빛에 새로운 빛을 보태주는 데 대하여 나를 찬미해야 할 것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보고 너희들 안에 내 시대의 의인들이 받았던 그 정신적인 충격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이 지식을 통해서 너희들의 정신 안에 너희들 구해줄 사랑을 새롭게 하기에 이르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은 완덕으로 올라 가는 일일 터이니까.

나는 너희들이 ‘죽어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잠들었거나 졸고 있어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나무들과 같다고 말하겠다. 하느님의 태양이 너희들에게 그 찬란한 빛을 준다. 잠을 깨서 너희에게 주어지는 태양을 찬미하고, 그 태양이 너희들 곁에서 안에까지 덥게 해서 너희 잠을 깨우고 너희를 꽃과 열매로 뒤덮이게 하도록 기꺼이 받아들여라.

일어나서 네 하느님께로 오너라.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하고 내가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하고 내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말을 지금도 또 한다. 박사들과 사마리아인들에게. 이 양극단의 계급의 사람들에게 이 말이 필요하고, 또 이 양극단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사들에게는 영양 불량이 되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도 힘을 잃지 않고, 사람인 하느님이요 선생이고 구세주인 하느님을 알지 못해서 활기를 잃은 사람들을 위한 초자연적인 양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마리아인들에게는 그들이 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영혼들이 샘솟는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박사들과 사마리아인들 중간에 있는 사람들, 즉 중죄의 지위에 있지는 않지만 게으름과 냉담과 성덕에 대한 그릇된 개념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물이 필요하며, 특히 자기들은 지옥의 길을 가고 있지 않고 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고, 복잡하게 얽힌 피상적인 계율 준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깎아지른 듯 가파른 용맹의 길로는 한 걸음도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샘솟는 물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들이 처음에 가졌던 자극을 다시 얻어 그 수구(守旧)에서 벗어나 영웅적인 길을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이 음식과 이 신선한 음료를 준다. 내 말을 생명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을 나와 함께 생명 안에 데리고 있기를 원한다. 나는 정신의 생명이 되는 힘을 없애는 사탄의 독기에 균형을 잃지 않게 하려고 내 말을 증가시킨다.

나를 물리치지 말아라.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나를 주기를 갈망한다. 내 갈망은 가라앉힐 수가 없다. 나는 너희들을 천상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하여 나를 너희들에게 주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너희가 활기를 잃고 시름시름하지 않기 위하여, 너희가 세상이라는 함정과 가시덤불과 뱀이 가득 찬 이 사막에서 고생을 이기고 난 다음 어린 양의 혼인잔치, 즉 하느님의 큰 잔치를 위하여 꾸민 옷을 입고, 너희들 안에 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길 속으로 지나가도 손상을 입지 않고 뱀을 밟고 독약을 마셔도 죽지 않게 되기 위하여는 너희에게 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집어라. 이 책을 집어라. 그리고 봉하지 말고(묵시22:10) 읽어라. 그리고 그 때가 가까웠으니(묵시22:10)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게 하여라.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더 거룩하게 되게 하여라.’ (묵시22:11)

이 책에서 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지키기 위하여 너의 이 가까이옴이 이루어지기를 ‘주 예수여, 오소서!’하고 사랑의 부르짖음으로 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너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내게 따로 말씀하신다.


“이 작품 첫머리에 요한 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를, 씌어진 그대로 전부 써 넣어라. 요한은 네가 이 책에서 이야기한 모든 말들을 쓴 것과 같이 그 말들을 하느님의 성령께서 불러주셔서 쓴 것이다. 주기도문과 최후의 만찬 후에 내가 드린 기도에 보탤 것도 뺄 것도 도무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보탤 것과 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점들에 대한 모든 말들은 하느님의 보석이어서 만져서는 안 된다. 이 점들에 대하여 할 일은 한 가지 뿐이다. 성령께 그 아름다움과 지혜를 모두 밝혀 주시기를 열렬히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내 공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르면, 요한 복음 1장 19절부터 28절까지와 루가 복음 3장 3절부터 18절까지를 전부 마치 한 장인 것처럼 차례로 qpRU 놓아라. 거기에는 말이 별로 많지 않고, 심한 고신극기를 하는 고행자인 선구자 전체가 소개되어 있으며, 다른 말은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 다음 내 세례 잉기를 하고, 내가 그때그때 일러준 것과 같이 계속해서 나아가라.

그리고 네 피로도 끝났다. 이제는 사랑과 즐거움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네게 주는 상이다.

내 영혼아, 이제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느냐? 너는 내게 몰입한 정신으로 ‘주님, 이제는 당신 종인 저를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질그릇을 깨뜨려서 그 정수(精髓)를 나 있는 데로 가져 가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둘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얼마 동안 네가 필요하다. 네 안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의 냄새인 네 향기를 발산하기 위하여 아직 얼마 동안 너를 여기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 때에는 내가 요한에게 말한 것처럼 네게 말하겠다. ‘만일 내가 너를 데리러 올 때까지 네가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하고.

지칠 줄 모르는 내 목소리였던 귀여운 너에게 평화, 너에게 평화, 평화를 주마. 선생님이 ‘고맙다’고 네게 말한다. 주님이 ‘복을 받아라’하고 네게 말한다. 예수, 네 예수가 네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즐거우니까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하고.

작은 요한아, 내 평화를 받아라. 내 가슴에 와서 쉬어라.”


그리고 이 말씀과 더불어 작품의 편집에 대한 조언도 끝났고, 마지막 해석도 주어졌다.


비아렛지오에서 1947년 4월 28일

마리아 발또르따







155. 보즈라로 가는 길에



상인의 말이 옳았다. 이 10월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날씨가 길손들에게 주어질 수는 없었다. 마치 자연이 초목들이 잠자는 위에 휘장을 펴놓으려고 한 것처럼 들판을 덮고 있는 안개가 걷히자, 햇살이 따뜻하게 하는 경작된 들판 전체가 장엄하게 나타난다. 안개들은 먼 곳에 있는 산꼭대기들을 투명한 거품의 리본으로 장식하여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한층 더 몽롱하게 하려고 모인 것 같다.

“저 산들은 무슨 산들입니까? 우리가 넘어가야 할 산들 말입니다” 하고 베드로가 걱정이 되어 묻는다.

“아닙니다. 아니예요. 저 산들은 아우란산인데, 우리는 저 산들 이쪽 평야에 있게 됩니다. 저녁나절에는 아우라니뜨의 보즈라에 도착할 터인데, 아름답고 좋은 도시이고 상업이 번창한 도시입니다” 하고 상인이 단언하면서 그 도시 칭찬을 하는데, 이 사람은 어떤 곳의 아름다움의 바탕에는 언제나 상업의 번창을 깐다.

예수께서는 따로 떨어져 계시고자 하실 때에는 매번 그러시는 것처럼 뒤에 혼자 쳐져서 가신다. 마륵지암은 예수를 쳐다보려고 여러 번 돌아본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요한을 떠나서 길가에 있는 표지 위에 앉아서 기다린다. 그 표지는 로마인들의 군대 표지임이 틀림없다. 예수께서 그가 있는 위치에 이르시자, 아이는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예수 곁에 가서 따라간다. 다만 그가 있는 것을 보는 것으로라도 예수께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약간 뒤에 쳐져 있으면서 살펴보고 또 살펴본다.…그리고 계속 살펴보는데, 마침내 예수께서 당신의 명상을 마치시고 당신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시고 돌아보신다. 그리고 어린 아이에게 손을 내미시고 미소 지으시면서 말씀하신다. “오! 마륵지암! 너 혼자 여기서 뭐하니?”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나는 여러 날째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어요.

모든 사람이 눈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같은 걸 보진 못해요. 나는 선생님이 대단히 자주 혼자 있는 걸 봤어요.…처음 며칠 동안은 선생님이 무슨 일로 기분이 상찬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얼마 후에는 선생님이 늘 같은 시간에 그러는 걸 보고, 또 선생님이 슬퍼할 때에는 언제나 위로하는 선생님의 어머님이 선생님이 그런 얼굴을 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대로 말을 하고 있었으면 어머님도 입을 다물고 정신을 가다듬는 걸 봤어요. 난 볼 줄 알거든요, 아세요? 그건 내가 선생님과 어머니가 하는 대로 하려고 늘 선생님과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 야요. 난 사도들에게 선생님이 뭘 하느냐고 물었어요. 선생님은 분명 뭘 하고 있거든요. 그랬더니 ‘기도하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말하면서 기도해요?’ 하고 물었더니 아무도 대답을 못했었어요. 사도들은 모르니까요. 몇 해째 선생님하고 같이 있으면서 그걸 몰라요.

오늘 나는 선생님이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따라왔어요, 그리고 선생님이기도하는 걸 봤어요. 그렇지만 늘 같은 얼굴이 아니예요. 오늘 아침 새벽에는 선생님이 빛의 천사 같았어요. 선생님이 어떻게나 강한 눈길로 물건들을 바라다보는지 그것들을 해보다도 더 어두움에서 끌어내는 것같이 생각했어요. 물건들과 사람들을. 그 다음에는 하늘을 쳐다봤는데, 그때는 식탁에서 빵을 바칠 때와 같은 얼굴이었어요. 그 다음 우리가 마을을 지나올 때에는 선생님이 혼자서 맨 뒤에 처졌는데, 그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말을 열심으로 해주는지 아버지같이 보였어요.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멀지 않아 자네를 도와주구 자네 같은 사람들을 도와줄 테니까 참을성 있게 견디어내게’ 하고 그 사람은 우리에게 개를 덤비게 한 짐승 같은 사람의 노예였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는 선생님이 우리를 아주 사랑 가득한 인자한 눈으로 보고 있었어요. 그때에는 선생님이 어머니 같았어요.…그렇지만 지금은 선생님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얼굴이예요.…예수님, 지금 뭘 생각하길래 항상 그런 얼굴을 하세요? …어쩌다 저녁때 내가 자지 않고 있을 때엔 선생님이 매우 심각한 걸 보게 되거든요, 선생님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왜 기도하는지 말해주세요.”

“물론 네게 말해 주고말고. 그러면 네가 나와 함께 기도할 거다. 하루는 하느님께서 전부 주시는 거다. 환한 날이나 어두운 날이나, 낮이나 밤이나 말이다. 사는 것과 빛을 가지는 것은 하나의 은혜이다. 사람이 사는 방식은 거룩하게 하는 것의 일종이다. 그렇지? 그러면 자기를 거룩하게 지키고, 우리 마음에 항상 지극히 높으신 분과 그분의 인자를 생각하고, 또 동시에 마귀를 먼 곳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는 온 하루의 모든 순간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새들을 살펴보아라. 해가 처음 나타날 때에 노래를 하고 빛을 찬미한다. 우리도 하느님의 선물인 빛을 찬미해야 하고, 우리에게 빛을 주시며 당신 자신이 빛이신 하느님을 찬미해야 한다.

아침에 날이 밝자마자 밝아지는 오늘 하루 위에 빛의 도장을 찍고 빛의 색조를 띠게 하여 온 하루가 빛나고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원해야 하고, 조물주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온 피조물과 일치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 때에, 그리고 시간이 지나는데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고통과 무지에 대한 확인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때에, 고통이 덜어지고 무지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도록 또 기도해야 한다.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하느님을 알면 그들의 고통 속에서도 항상 위로를 받을 것이다. 또 오정 때에는 가정의 사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결합해 있는 이 선물을 맛보아야 한다. 이것도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음식이 그 유익한 성질에서 죄의 기회가 되는 성질로 변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 황혼에는 죽음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황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하루나 우리의 일생의 황혼이 항상 은총 지위에 있는 우리 영혼과 더불어 끝나도록 기도해야한다. 그리고 등불이 켜질 때에는 끝나는 하루에 대해서 감사하고, 뜻밖의 심판과 마귀의 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잠들도록 보호와 용서를 청하기 위하여 기도해야한다. 끝으로 밤 동안에는 -그러나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닌 사람들의 경우이다-밤의 죄악을 방비하고, 약한 사람들에게서 사탄을 물러가게 하고, 죄있는 사람들에게는 반성과 좋은 결심과 더불어 뉘우침이 와서 그것이 날이 밝음과 동시에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이제는 의인이 하루 종일 어떻게 또 왜 기도하는지 알았지.”

“그렇지만 선생님은 오후 세시에 왜 그렇게 심각하고 위엄있게 생각에 골몰하는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간의 희생으로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구속되게 하십시오’ 하고. 너도 그렇게 말해라 ….”

“그게 무슨 희생인데요? 향은 아침저녁으로 올린다고 선생님이 말하셨지요. 희생제물은 날마다 같은 시간에 성전의 제단에 드리구요. 그리고 소원과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은 매시간 올리구요. 그렇지만 오후 세시는 특별한 의식을 하는 걸로 돼 있지 않아요.”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아이를 두 손으로 참으신다. 그리고 아이를 쳐들어 당신 앞에 드신 채 시편 구절을 외시는 것처럼 얼굴을 드시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오정과 세시 사이에는 구세주와 속죄자로 온 그가 배신의 쓴 빵을 먹고 생명의 단 빵을 준 다음, 양조(釀造)통 속에 있는 포도송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짠 다음, 자기 자신 전체로 사람들과 초목의 갈증을 풀어준 다음, 자기 피로 왕의 주홍빛 옷을 만들어 입고, 왕관을 쓰고 왕홀(王笏)을 들고, 시몬과 이스라엘과 세상이 보도록 그의 옥좌를 높은 곳으로 옮긴 다음 그의 제사를 완성할 것이다. 그의 수없이 많은 상처로 만들어진 주홍빛 옷을 입고, 어두움 속에서 빛을 주기 위하여, 죽음 속에서 생명을 주기 위하여 그는 오후 세시에 죽을 것이고. 세상은 구속될 것이다.’”

마륵지암은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얘져서 예수를 쳐다보며, 입술은 울려고 비죽거리고, 겁에 질린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린다. 그는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지만 구세주는 선생님이지요! 그럼 선생님이 그 시간에 죽을 거야요?”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벙싯 벌어진 작은 입이 눈물을 마시고 있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린 제자야, 그것은 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발작적인 울음을 터뜨리므로 어린 아이를 가슴에 안으시면서 말씀하신다. “그러면 너는 내가 죽는 것이 슬프냐?”

“오! 하나밖에 없는 내 기쁨! 나는 그거 싫어요! 나는 … 선생님 대신 나를 죽게 하세요….”

너는 나를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 알았지. 그러나 잘 들어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죽겠다. 그리고 나는 부활할 것이다. 너 요나를 기억하고 있지? 요나는 고래의 뱃속에서 쉬고 힘세게 되고 더 아름답게 되어서 나왔다. 나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곧 네게로 와서 이렇게 말하겠다. ‘어린 마륵지암아, 네 눈물이 내 목마름을 없앴고, 네 사랑이 무덤 속에서 나와 같이 있어 주었다. 이제는 네게 (내 사제가 되어라)하고 말하려고 왔다.’ 그러면서 내게서 아직 천국의 향기를 풍기면서 네게 입맞춤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어디 있을 거야요. 베드로 아버지와 같이 있지 않을 거야요? 선생님의 어머니와 함께 있지 않을 거야요?”

“나는 그 며칠 동안의 지옥의 물결에서 너를 구해 주겠다. 가장 약하고 가장 죄없는 사람들을 구해 주겠다. 한 사람만 빼놓고… 내 어린 사도 마륵지암아, 그 시간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겠니?”

“도와주구 말구요, 주님!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이것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큰 비밀. 이것은 하느님께서 어린이들에게 당신을 나타내보이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이젠 울지 말아라. 그 다음에는 내가 다시는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네 사랑을 시작으로 해서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랑만을 기억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웃어라. 가자, 가자.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멀리 갔는지 보아라. 뛰어 가서 따라잡자.” 그러시면서 예수께서는 마륵지암을 내려놓으신다.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일행을 따라잡을 때까지 두 사람은 뛴다.

“선생님, 뭘 하셨습니까?”

“마륵지암에게 하루의 시간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이애가 울었어요? 얘가 못되게 굴었는데, 선생님이 인자롭게 용서하시는 거로군요” 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아니다, 시몬아 이 아이는 내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 이 아이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래서 말해 주었다. 이 아이는 내 말을 듣고 감격했다. 이제는 얘를 가만 놔두어라. 마륵지암아, 내 어머니 곁으로 가라. 그리고 너희들 모두 똑똑히 들어라. 이 교훈을 듣는 것은 너희들에게도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루의 주요한 시간들에 하는 기도의 유익함을 다시금 설명하신다. 다만 오후 세시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으신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가호를 빌기 위하여 하느님을 항상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라. 그러면 정신생활에 향상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보즈라가 가까워졌다. 평야에 펼쳐진 이 도시는 성곽과 탑들이 있어 크고 아름다워 보인다. 기울어가는 저녁 해는 성곽과 집들과 들판의 색조에 뉘앙스를 주어, 우수(憂愁)가 잔뜩 깃든 회색을 띤 릴라빛깔을 띠게 한다. 이 빛깔 속에서 물체의 윤곽이 사라진다. 한편 성곽 밖의 우리에 가둔 양들의 매애매애 우는 소리와 돼지들의 꿀꿀거리는 소리가 들판의 적막을 깨뜨린다. 성문을 지나 대상이 좁은 골목길들이 뒤얽힌 데로 들어서자 적막은 끝나는데, 그 좁은 골목들은 밖에서 보고 도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냄새 그리고 … 역한 냄새가 복잡한 좁은 길에 맴돌고 있는데, 여관이 있는 장마당인 듯한 광장에까지 여행자들을 따라온다.

이렇게 하여 일행은 보즈라에 도착하였다.




97. 막달라 마리아가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의 집에 


  복합적인 내 고통을 덜어주시고 사람들의 여러 가지 악의를 잊게 하시려고 내 예수님은 이 기분 좋은 명상을 내게 허락하셨다.       


  매우 호화로운 큰 방이 보인다. 심지가 많이 있는 큰 둥이 매달려 있고, 심지마다 불이 켜져 있다. 벽에는 매우 아름다운 장식융단이 걸려 있고, 의자들은 쪽매붙임과 상아 상감(象嵌)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가구들도 매우 아름답다.

  한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큰 식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식탁 네 개를 모아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식탁은 분명히 많은 손님(전부 남자) 때문에 이렇게 배치되었을 것인데, 매우 아름다운 식탁보가 덮여 있고 호화로운 식기들이 놓여 있다.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와 값진 술잔들이 많고, 하인들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음식을 가져오기도 하고 포도주를 따르기도 한다. 정사각형의 한가운데에는 아무도 없다. 방바닥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타일이 깔려 있는데, 그 위에 기름을 쓰는 큰 등의 불빛이 반사한다. 반대로 바깥 쪽에는 많은 침대형 의자가 놓여 있고. 거기에는 모두 손님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방 안쪽 어둠침침한 구석 문옆에 있는 것 같다. 문은 바깥으로 활짝 열려 있으나, 동시에 문의 장식틀에서 늘어져 있는 두꺼운 융단 또는 타피스리로 가려져 있다.

  문에서 제일 먼 쪽에 집주인과 귀빈들이 있다. 주인은 수놓은 허리띠를 허리를 졸라맨 넓은 흰 옷을 입은 나이 많은 사람이다. 옷에는 목과 소매끝과 옷 자체에도 수놓은 리본이나 장식줄을 달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저 작은 노인의 얼굴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사람의 얼굴은 악의가 있어 보이고 차갑고 교만하고 탐욕스럽다.

  맞은 편에 그와 마주 보고서 예수님이 자리하셨다. 나는 예수를 옆으로 본다. 거의 뒤에서 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는 늘 입으시는 휜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계시며 긴 머리는 늘 그러시는 것처럼 이마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나는 예수와 모든 손님이 그 침대형 의자에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이, 즉 식탁과 수직으로 누워 있지 않고 식탁과 거의 평행으로 누워 있는 것에 주의한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환상으로 볼 때에는 이 세밀한 점에는 별로 주의를 하지 않았었고, 그들이 왼쪽 팔꿈치를 괴고 먹는 것을 보았었지만 침대가 덜 호화롭고 훨씬 더 짧았기 때문에 그들이 누워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침대형 의자들은 진짜 침대들이고 터어키풍(風)의 현대식 긴 의자와 비슷하다.

  예수의 곁에는 요한이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 왼쪽 팔꿈치를 괴고 계시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요한은 식탁과 주님의 몸 사이에 박혀서 선생님의 겨드랑께에 와 있게 되어 예수께서 식사하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고, 또 원하면 예수의 가슴에 은밀히 기댈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여자들은 없다. 모두가 말을 한다. 그리고 집주인은 가끔 예수께 말을 거는데, 몹시 친숙한 태도를 일부러 지어보이고 분명히 교만한 태도를 보인다. 보잘 것 없는 예언자이고 사람들이 좀 흥분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예수를 그의 호화로운 집에 초대한 것은 예수께 큰 명예가 된다는 겻을 예수와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예수께서 조용히 정중하게 대답하시는 것을 본다.

  문어귀를 가린 호화로운 타피스리가 들리면서 대단히 아름답고 호사스런 옷을 입고 머리를 정성스럽게 다듬은 젊은 여자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숱이 대단히 많은 금발은 예술적으로 땋은 머리채로 참다운 머리의 장식을 이루었다. 그 여자의 머리채가 어떻게나 숱이 많고 반짝이는지 온통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는 금투구를 쓴 것 같다. 성모님이 늘 입고 계신 것을 본 옷과 비교라면 매우 남다르고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을 옷을 입고 있다. 어깨에는 고리쇠들이 있고, 가슴 윗쪽의 주름을 고정시키는 보석들이 있고, 가슴의 윤곽을 나타내는 금사슬들이 있으며, 금과 보석으로 된 버클이 달린 허리띠가 있다. 매우 아름다운 그의 육체의 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선정적인 옷이다. 머리에는 베일을 썼지만 하도 얇은 베일이어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뿐이다. 발에는 금 버클이 달린 매우 호화로운 샌들을 신었는데, 발목에는 얽어서 만든 끈으로 매는 붉은 가죽으로 만든 샌들이다.

  예수를 빼놓고는 모두가 그 여자를 보려고 몸을 돌린다. 요한은 잠깐 그 여자를 살펴보고는 예수 쪽으로 몸을 돌린다. 다른 사람들은 눈에 띄는 나쁜 욕망을 가지고 그 여자를 바라본다. 그러나 여자는 그들을 조금도 쳐다보지 않고 그가 들어올 때에 일어난 속삭임과, 예수와 제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눈짓을 하는 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신다는 것을 보이시고, 계속 말씀을 하셔서 집주인과 시작하셨던 회화를 끝마치신다.

  여인은 예수께로 향하여 가서 선생님의 발 옆에 무릎을 꿇는다. 그 여자는 배가 대단히 불룩한 항아리 모양의 작은 단지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베일을 머리카락에 고정시키던 값진 머리핀을 빼서 베일을 머리에서 벗기고. 손가락에서, 반지 여러 개를 빼서 모두 침대형 의자의 예수의 발 옆에 놓는다. 그런 다음 두 손으로 예수의 발을, 먼저 오른 발, 그 다음에 왼발을 잡고 샌들 끈을 끌러 벗겨서 방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그 발에 입맞춤하고, 발에 이마를 갖다 대고 어루만지는데,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등불 빛에 반짝이고, 흠숭하올 그 발의 피부를 적신다.

  예수께서는 머리를 천천히 겨우 돌리시고 짙은 파란색 눈이 숙인 머리를 잠시 내려다보신다. 사죄(赦罪)하는 눈길이다. 그리고는 다시 방 가운데를 바라다보시고, 여인이 그의 심정을 마음대로 표명하게 내버려두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 받고 눈짓을 하고 히죽히죽 웃는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은 더 잘 보려고 잠간 일어나 앉았는데, 그의 눈은 욕망과 불만과 빈정거림을 나타낸다. 그로서는 그것이 여인에 대한 탐욕이다. 이 감정은 명백하다. 한편 그 여자가 그렇게도 무람없이 들어와서,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가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 불만이다. 끝으로 그것은 예수를 빈정거리는 눈짓이다….

  그러나 여인은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소리를 내지 않고 계속 눈물을 흘린다. 굵은 눈물만을 흘리며 어쩌다 흐느낀다. 그러다가 복잡한 머리 모양을 고정시키던 금으로 만든 머리핀들을 뽑아 머리를 풀고 ,그 머리핀들도 반지들과 베일을 고정시키던 굵은 핀 곁에 놓는다. 금발이 어깨 위로 펼쳐진다. 여인은 그 머리를 양손으로 잡아 가슴으로 가져다가 예수의 젖은 발을 마를 때까지 훔친다. 그리고는 작은 그릇에 손가락을 넣어서 노리게 하고 매우 향기가 짙은 연고를 꺼낸다. 백합꽃과 월하향(月下香)의 성질을 가진 향내가 온 방안에 퍼진다. 여인은 그것을 많이 꺼내서 펴서 바르고 입맞춤하고 어루만진다.

  예수께서는 이따금씩 애정이 넘치는 동정으로 여인을 내려다보신다.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돌아다 본 요한은 예수와 여인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요한은 예수와 여인을 번갈아 바라다본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공격적인 것이 된다. 나는 여기서 복음서에 있는 잘 알려진 말씀을 듣는다. 증오를 품은 노인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눈길을 곁들인 어조로 하신 말씀을 듣는다.

  여인에게 하신 사죄의 말씀을 나는 듣는다. 여인은 보석들을 예수의 발 앞에 남겨둔 채 떠나 간다. 여인은 베일로 머리를 감싸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할 수 있는 대로 베일 속으로 집어 넣는다. 예수께서는 “평안히 가거라” 하고 여인에게 말씀하시면서 숙인 머리에 더할 수 없이 다정스럽게 잠시 손을 얹으신다.




  98.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용서받는다”

  예수께서 이제는 내게 말씀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과 그의 친구들에게 머리를 숙이게 한 말로, 복음서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그 말은 내 영이 내 눈길을 통해 그의 냉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에 화살처럼 쏘아서 박은 말들이다. 나는 말로 했을 것보다도 훨씬 더 힘있게 대답하였다. 사람들의 생각을 나는 모두 환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 말보다도 훨씬 더 심한 비난을 내포한 내 무언의 말을 알아 들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눈에 선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의에 찬 암시를 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이 가진 타락한 열정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관능성에 자극되어서 내게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과 같지도 않고, 당신의 동료들과도 같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내게 온 것은 내 시선과 우연히 들은 내 말이 음란이 어두움을 만들어 놓았던 그의 영혼을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여인이 온 것은 그가 관능성을 극복하기를 원하는데, 불쌍한 여자인 그가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내게서 사랑하는 것은 영입니다. 초자연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이 여인이 알고 있는 영일 뿐입니다. 당신들의 악습을 위하여 그의 약함을 이용하고 나서는 멸시하는 채찍질로 보상을 해준 당신들 모두 에게서 그 많은 화를 입은 뒤에 나를 찾아온 것은 그가 세상의 사치 가운데에서 찾아도 얻지 못했던 선과 기쁨과 평화를 얻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인 바리사이파 양반, 마음의 그 문둥병을 고치고, 사물을 올바르게 볼 줄을 아시오. 당신 정신의 교만과 당신 육체의 음란을 버리시오. 그것은 육체의 문둥병보다도 더 역겨운 문둥병입니다. 육체의 문둥병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내게 호소하기 때문에 내가 만져서 당신들을 고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의 문둥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 문둥병이 당신들의 마음에 들어서 당신들이 그것을 고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것을 고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여인을 깨끗하게 하고, 그의 속박의 사슬을 풀어 줍니다. 죄녀는 죽었습니다. 죄녀의 흔적은 여기 이 장신구들 안에 들어 있습니다. 나와 내 제자들의 필요에 씀으로써, 또 내가 다른 사람들의 여분의 재산을 가지고 도와주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씀으로써 거룩하게 해달라고 부끄러워하며 내게 바친 이 장신구에 말입니다. 남의 여분의 재산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우주의 주인인 내가 사람의 구세주가 된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녀는 여기 내 발에 부어서 그의 머리카락들과 같이 모욕을 당한 이 향유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빛을 가져다 주기 위해 그 먼 길을 걷고 났는데, 당신은 당신 우물의 물로 시원하게 해주는 것을 소홀히 한 육체의 이 부분에 부은 향유 속에 말입니다. 죄녀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생명으로 되돌아와서 그의 심한 고통과 진실한 사랑으로 다시 깨끗한 처녀같이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의 눈물로 자신을 씻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양반, 나 진정으로 말합니다만, 깨끗한 젊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은총 안에 다시 태어나는 마음의 진정한 뉘우침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 여인 사이에 나는 구별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사람과 뉘우치는 여인에게 그 누구보다도 내 생각을 이해하는 소임을 맡기고, 내 육체를 장사지낼 소임을 맡기고, 내가 부활할 때 첫번째(내 어머니께 드린 개별적인 인사는 빼놓고) 인사를 할 것입니다.’ 내가 내 눈길로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너에게는 너를 기쁘게 하고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다른 것 한 가지를 지적하겠다. 베다니아에서도 마리아는 그의 구속(救贖)의 시작을 나타내는 행동을 되풀이하였다. 되풀이 되어서 어떤 사람의 독자적인 품격과 같이 개성을 나타내는 독특한 행동들이 있는 것이다. 독자적인 행동들이다. 그러나 당연히 그래야 했지만 베다니아에서는 덜 모욕적이었고, 경건한 흠숭 속에도 더 신뢰하는 행동이었다.

  마리아는 그의 구속이 시작된 뒤로 많이 전진하였다. 많이, 사랑이 빠른 바람과 같이 마리아를 높은 곳을 향하여 앞으로 이끌어 갔다. 사랑이 장작불과 같이 마리아를 불사르고 그의 안에서 더러운 육체를 부수어 버리고, 깨끗해진 정신을 그의 최고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어머니의 옷과 같이 검소해진 옷과 머리 모양과 눈길과 아주 새로워진 몸가짐과 말이 달라진 것과 같이 다시 찾은 여인의 품위로 달라진 마리아는 같은 행동으로 나를 공경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지고 있다. 마리아는 나를 위해 남겨놓았던 그의 마지막 향수병을 가지고와서 사랑과 용서받고 구원되었다는 확신으로 명랑해진 눈길로, 울지 않고 내 발에 그것을 붓고 내 머리에도 붓는다. 마리아가 이 기름 바르는 일을 내게 할 수 있고, 이제는 내 머리를 만질 수 있다. 뉘우침과 사랑이 마리아를 세라핌 대천사들의 불로 깨끗하게 만들어서, 마리아가 세라핌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작은‘목소리’인 마리아야, 너 자신에게 이 말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말을 하여라. 가서 자기들이 죄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감히 내게 오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이 말을 하여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많이, 많이 용서받는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말이다. 불쌍한 영혼들아, 구세주께서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너희는 모른다! 나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아라. 오너라. 자신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내 마음의 문을 열고 팔을 벌려 너희를 맞아들인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여라. ‘나는 손상되지 않은 순결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은총에 새로 난 마음의 진실한 뉘우침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나는 구세주이다. 이 말을 항상 기억하여라.

  평안히 가거라. 네게 강복을 준다.




  99. 막달라 마리아의 회개에 대한 고찰 



  오늘 나는 어제 저녁에 예수께서 불러 주신 것과 내가 보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지 않아도 이해한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가 부수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회식자들의 회화 중에서 내가 알아들은 회화, 즉 특히 예수를 상대로 하던 회화는 그때의 사건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과 율법에 대한 그들의 반대, 그리고 새로운 학파의 스승으로서와 예수의 사명 따위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친절한 외양 밑에는 예수를 당황하게 하려고 내놓은 교활하고 걸려들기 쉬운 질문들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께서 어떤 지적에도 몇 마디 안 되는 말로 올바르고 결정적인 대답을 하셨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어떤 학파나 독특한 당파의 새로운 선생이 되셨느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그저 이렇게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학파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거룩한 율법으로 그분을 따르고 하느님께 대해 마음을 써서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러시면서 요한을 사랑을 가지고 보셨고, 요한을 통하여 곧은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을 보셨다) 율법이 주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반포하신 날 그랬던 것과 같이 그 본질이 완전히 새로워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빛으로 도로 데려옵니다.”

  팔레스티나의 최고 지배가 되었던 카이사르의 남용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다른 질문에 대하여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카이사르가 지금과 같이 된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일을 기억하십시오. 이사야는 하느님의 영감으로 앗수르를 하느님의 분노의 ‘몽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너무 멀리 떠나고 옷과 정신을 위장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벌하는 회초리라고? 그리고 벌하기 위하여 그를 쓰신 다음, 그가 교만하고 사납게 되어 그의 직무를 남용하겠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부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두 가지 대답이었다.       

  그런 다음 오늘 저녁 내 예수님은 미소 지으시면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다니엘처럼 불러야 할 것이다. 너는 갈망하는 사람이고, 네가 하느님을 몹시 갈망하기 때문에 내게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래서 내 천사를 시켜서 다니엘에게 한 말을 계속 네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이해하려고 마음을 쓰고 하느님 앞에서 몹시 슬퍼하는 데 마음을 쓴 첫날부터 네 기도는 들어졌고, 네 기도 때문에 내가 왔으니 두려워 말아라’ 하고 그러나 여기서는 천사가 말하지 않고, 나 예수가 말한다.       


  마리아야, 어떤 사람이 ‘이해하려고 마음을 쓰면’ 나는 언제든지 온다. 나는 무정하고 준엄한 하느님이 아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비이고, 내게로 향하는 사람에게 생각보다도 더 빨리 간다.

  죄에 깊숙히 빠져 있던 불쌍한 막달라 마리아를 위해서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 하느님의 빛과 자기의 암흑의 처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의 안에 생겼다는 것을 내가 느끼자마자 내 정신으로 빨리 갔다. 마리아를 위하여 나는 빛이 되었다.

  그날 나는 많은 사람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마리아 한 사람을 위해서 말했다. 나는 그를 예속시키고 있던 육체에 대해 반항한 영혼의 정열에 자극되어서 가까이 왔던 마리아만을 보고 있었다. 비탄에 잠긴 가엾은 얼굴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던 기쁨의 거짓 외양 속에 그의 커다란 내적 고민을 감추고 있던 억지 웃음을 띠면서 오는 마리아만을 보고 있었다. 비유의 길잃은 양보다도 한층 더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있던 마리아, 밑바닥의 물을 가져오는 더 깊은 파도 모양으로 표면에 떠오른 그의 생활에 대한 혐오에 빠져 허덕이던 마리아만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거창한 말을 하지 않았고, 그를 모욕하지 않고, 도망하거나 자신을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거나 또는 오도록 강요하지 않기 위해 잘 알려진 죄녀인 그에게 적합한 주제는 다루지 않았다. 나는 마리아를 조용히 놓아두었다. 나는 내 말과 내 눈길이 그의 안으로 내려가 발효해서 일시적이었던 그 충동이 성녀로서의 그의 영광스러운 장래가 되게 했다. 나는 내 가장 기분 좋은 비유 중의 하나로 말했다. 바로 마리아를 위해 퍼져 나가는 빛과 친절의 계시이었다. 그리고 내 말이 바리사이파 사람의 교만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영광으로 발효할 수가 없던 교만한 부잣집에 그날 저녁 발을 들여놓으면서, 나는 마리아가 죄를 지었던 방에서, 그의 눈물의 빛으로 그의 장래가 결정되었던 방에서 그렇게도 많이 운 다음 그리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음란으로 타는 듯한 남자들은 마리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들의 육체를 떨었고, 그들의 생각에 의심이 스며드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깨끗한’ 두 사람, 즉 요한과 나를 빼놓고는 모두 마리아를 원했다. 그들은 모두 마리아가 진짜 마귀가 들려서 예기치 않은 일을 하게 되는 있을 법한 변덕의 충동을 받아서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탄은 이미 졌었다. 그래서 마리아가 그들 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는 것을 보고 샘을 내면서 나 때문에 온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다만 살과 피로 된 사람이기만 할 때에는 가장 깨끗한 것까지도 항상 더럽힌다. 깨끗한 사람들만이 올바르게 본다. 그들 안에는 생각을 흐리게 하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아야,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겁을 집어먹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이해하시는데, 하늘에 가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에게서 오는 영광은 천국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의 몫인 영광을 털끝만큼도 더해주지 못한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여라. 가엾은 막달라의 마리아는 그가 착한 행동을 할 때에도 항상 잘못된 판단을 받았다. 그가 나쁜 행동을 할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방탕아들에게 주는 음란의 몫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임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잘못된 판단을 받았고, 베다니아의 그의 집에서 비난을 받고 몹시 나무람을 당했다.

  그러나 훌륭한 말을 한 요한은 이 마지막 비판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준다. '유다는… 그가 도둑이었기 때문에' 라고.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바리사이파 사람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이 음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라고 자 알겠느냐? 관능성에 대한 탐욕과 돈에 대한 탐욕은 착한 행동을 비난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착한 사람들은 비판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들은 이해한다.

  그러나 되풀이해 말하지만, 세상의 비판은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다.       


  그리고 내일 가르칠 것을 네게 준비시키겠다. 다니엘서 12장에서 빛나는 내천사가 한 말을 표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평화가 너와 함께 있으니, 용맹하게 되고 굳세게 되어라.’ 그리고 너는 항상 ‘주님, 당신이 내게 새로운 힘을 주셨으니 말씀하십시오’ 하고 대답할 줄을 알아라.       


  그런 다음에 예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가르침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보면, 너는 ‘알 수 있는 것’ 전부라고 생각하는 선생을 몹시 좋아하는 부지런한 초등학생같이 생각한다. 한편 너 스스로 어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어떤 의견들을 말할 때에는(천상을 보는 동산에 말이다) 너는 꼭 아버지가 귀여운 손을 붙잡고 아이가 더 영리해지기 위해 보았으면 하고 아버지가 바라는 것 앞으로 데리고 가는 착한 어린이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시에 간섭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아이에게 무슨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아이가 생각이라는 면으로 스스로 커 간다고 느끼는 기쁨을 주기 위해서이다.

  네가 이렇게 하기 위하여는 항상 인간적인 걱정에서 자유롭게 벗어나야 한다. 점점 더 자유롭게 되도록. 너는 관조의 오솔길로 마음놓고 전진하기 위하여 점점 더 자신을 가져야 하고, 점점 더 안심하고, 네 손을 붙잡고 가는 나를 점점 더 신뢰해야 한다. 아버지는 그런 눈치는 보이지 않지만, 그에게 생각나게 하는 여러 가지 수단을 써서 아이에게 보이고 싶은 이러저러한 것을 아이가 보게 되도록 하고야 만다. 오! 나는 내 어린 것들에게 대해서 아버지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이고, 선생들 중에서 가장 참을성 있는 선생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온순하고 주의깊은 어린 것의 손을 잡을 수가 있게 되면 나는 행복하다. 선생이고 아버지인 것이 행복하단 말이다. 내 피조물인 인간들이 신뢰를 가지고 그들의 손을 내 손에 쥐어 주면서 내 인도를 받고 내 가르침을 받으며 ‘아버지를 무엇보다도, 그리고 내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해요!’ 하고 말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이와 같이 남김없이 완전히 ‘내 것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계시와 관조의 보물 창고를 열어주고 또 나를 남김없이 준다.

  마리아야, 그렇기 때문에 잠을 깨서 하느님을 희미하게나마 보도록 이끌어질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내 천주성을 여러 가지 표시로 알게 하라고 내가 너희를 뽑은 만큼 네가 보는 것을 아주 세심하게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라. 하찮은 것이라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것을 적당히 넘어가면 안 된다. 그것은 불성실하고 이기주의적인 일일 것이다. 너는 모든 사람이 그리로 올 수 있도록 물이 쏟아져 들어가는 하느님의 물받이 못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받아쓰기로 말하면 네가 더할 수 없이 충실하게 되었다. 관조에 있어서도 네가 매우 주의깊게 관찰한다. 그러나 급히 쓰려고 서두르는 까닭에, 그리고 네 개인적인 건강상태와 네가 처해 있는 환경 때문에 세밀한 것을 빠뜨리는 일이 있다. 그런 일은 피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여백에 써넣어라, 그러나 쓰기는 다 써야 한다. 이것은 비난이 아니라, 네 선생의 친절한 조언이다.

  며칠 전에 너는 이런 말을 내게 했다. ‘사람들이 제 중개로 주님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제 모든 피로와 제 온 생활을 정당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그것으로 저는 보상을 넉넉히 받는 것이 됩니다. 비록 주님 숨어 있는 작은 오랑캐꽃의 중개로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 한 사람만 친다 해도 주님의 숨은 오랑캐꽃은 행복할 것입니다’ 하고. 네가 주의를 더 기울이고 더 정확하면 할수록 내게로 오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질 것이고, 현재의 네 지복과 장래의 영원한 네 지복이 더 클 것이다.

  잘 있어라. 네 주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



136. 빵을 많아지게 하신 첫번째 기적

여전히 같은 장소이다. 다만 해는 호수의 물이 강의 하상(河床)으로 흘러들어가는 곳 가까이에 있는 황량한 이곳에 요르단강가에 우거진 덤불을 통해서 동쪽에서 오지 않고,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오기는 하지만, 마지막 햇살로 하늘에 줄을 그으면서 영광스러운 빨간 빛으로 내려오는 동안 서쪽에서부터 온다. 그리고 우거진 나뭇잎들 아래를 지나오는 빛은 매우 부드럽게 되어 저녁의 조용한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본 해에 취하고, 이웃 들판에서 얻어먹은 풍부한 먹이에 취하여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신나게 부른다. 저력은 하룻날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내려앉는다. 사도들은 당신 앞에 나타나는 예에 따라서 계속 교훈을 주시는 예수께 이 점을 지적한다.

“선생님, 저녁이 가까웠는데, 이곳은 집과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황량한 곳이고, 그늘이 지고 축축한 곳입니다. 얼마 안 있어, 여기서는 저희들이 볼 수도 없고 걸어 다닐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달은 늦게 뜹니다. 사람들을 돌려 보내셔서 다리케아나 요르단강 근처 마을들에 가서 음식을 사고 잘 곳을 찾게 하십시오.”

“저 사람들이 갈 필요는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어라. 그들은 나를 기다리면서 잔 것과 같이 여기서 잘 수 있다.”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남았을 뿐입니다. 선생님도 그걸 아시지요.”

“그것들을 가져오너라.”

“안드레아야, 아이를 찾으러 가거라. 그애가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조금 전에 그애가 율법학자의 아들과 다른 어린이 둘과 같이 왕놀이를 하면서 꽃으로 관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찾으러 가고, 요한과 필립보도 계속 자리를 옳기는 군중 가운데에서 마륵지암을 찾기 시작한다. 그들은 마륵지암을 거의 동시에 찾아냈다. 아이는 식량이 든 배낭을 어깨에서 허리로 비스듬히 메고, 머리에는 참으아리의 긴 덩굴을 메고, 허리에는 참으아리 덩굴 허리띠를 맸는데, 거기에서는 검 대신으로 부들이 매달려 있다. 칼밑은 부들 전제로 되어 있고, 칼날은 부들대로 되어 있다. 마륵지암과 함께 같은 차림을 한 어린이 일곱 명이 있다. 그들은 율법학자의 아들을 따라다니는데, 이 아이는 많이 고통을 당한 사람다운 매우 사려 깊은 눈을 가진 대단히 가냘픈 어린이로, 다른 아이들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져서 왕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륵지암아, 오너라. 선생님께서 부르신다.”

마륵지암은 친구들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꽃 장식을…떼버리지도 않은 채 빨리 간다. 그러나 다른 어린이들도 그를 따라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내 꽃줄 장식을 한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이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쓰다듬어주신다. 그동안 필립보는 배낭에서 빵이 있고 그 가운데 큰 생선 두 마리, 2킬로그램 혹은 조금 더 되는 생선이 들어 있는 꾸러미를 꺼낸다. 열일곱, 아니 마나엔까지 치면 열여덟 명이 되는 예수의 일행에게도 부족한 양이다. 그 음식을 선생님께 가져온다.

“좋다. 이제는 바구니들을 가져오너라. 각자가 하나씩 열일곱 개를. 마륵지암은 어린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예수께서는 여전히 당신 곁에 남아 있는 율법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시며 물으신다.

“당신도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소?”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을 주시오. 당신에게 그것을 허락하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그 생선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지고 여자와 어린이들 말고도 거의 5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실 생각입니까?”

“확실히 그렇소. 의심하지 마시오. 믿는 사람은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아이고! 그러면 저도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도 바구니를 하나 달라고 하시오.”

사도들은 넓고 낮거나 깊고 좁은 바구니들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리고 율법학자는 꽤 작은 바구니를 가지고 돌아온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또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가장 크다고 생각 되는대로 골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다. 모두 이 앞에 놓고 군중들을 질서 있게 할 수 있는 대로 줄을 맞추어서 앉게 하여라.”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생선을 얹은 빵들을 들어올려 봉헌하시고, 기도하시고, 강복하신다. 율법학자는 잠시도 눈을 예수에게서 떼지 않는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를 쪼개서 열여덟 몫을 만드시고, 생선 두 마리도 마찬가지로 열여덟 몫을 만드신다. 예수께서 생선 한 조각을, 아주 작은 조각을, 바구니마다 넣으시고, 빵 열여덟 덩어리를 가지고 한입에 들어갈 만한 크기로 쪼개신다. 덩어리 하나하나를 여러 입거리로 쪼개신다. 그 조각들은 비교적 많아서 스무개 가량 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렇게 쪼개진 다음 빵 덩어리 하나하나가 생선 조각과 함께 바구니에 넣어진다.

“자 이제는 가지고 가서 실컷 먹게 나누어 주어라. 자, 가라. 마륵지암아, 가서 네 친구들에게 주어라.”

“아이고! 무거워라!” 마륵지암은 그의 바구니를 쳐들고 즉시 그의 어린 친구들에게로 가면서 말한다. 그는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것처럼 걷는다. 사도들과 제자들과 마나엔과 율법학자는 마륵지암이 가는 것을 바라다보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모른다.…그러다가 바구니를 들고 머리를 흔들면서 서로 말한다.

“어린 것이 장난을 하는구먼! 전보다 더 무겁지도 않은데”

율법학자도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고, 이제 별로 환하지 않기 때문에 손을 넣어 바구니 밑을 더듬어본다. 좀 저쪽 나무가 없는 곳은 아직 꽤 밝은데, 예수께서 계신 나무 그늘 밑에는 그리 환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로 가서 나누어주기 시작한다. 그들은 주고, 주고, 또 준다. 그들은 점점 더 멀리 가면서 놀라 이따금씩 예수 쪽을 돌아다본다. 예수께서는 팔짱을 끼고 나무에 기대어 서시어 그들의 대경실색을 보시고 빙긋이 웃으신다.

분배는 오래 걸리고 풍부하다.…놀람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오직 마륵지암 뿐이다. 그는 그 많은 가엾은 어린이들의 손에 빵과 생선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 기뻐서 싱글벙글한다. 예수께 돌아오는 것도 그가 제일 먼저이다.

“저는 많이, 많이, 많이 주었어요! …배고픈 게 어떤 건지 저는 알거든요….” 그러면서 얼굴을 쳐드는데, 이제는 사라진 추억 속에서나 그럴 뿐 야윈 얼굴이 아니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면서 얼굴이 창백해진다.…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쓰다듬어 주시니 그 어린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돌아온다. 마륵지암은 탁 믿고, 그의 선생님이요 보호자이신 예수께 몸을 기댄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천천히 돌아오는데, 너무 놀라서 말을 못한다. 맨 마지막에 율법학자가 돌아오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웅변보다도 더한 행동을 한다. 무릎을 꿇고 예수의 옷자락에 입맞춤을 하는 것이다.

“너희 몫도 가지고, 내게도 좀 다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먹자.”

과연 그들은 각기 식욕대로 음식을 먹는다.…그동안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은 그들의 느낌을 서로 말한다. 예수 둘레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마륵지암을 바라다보면서 감히 말을 한다. 마륵지암은 생선을 마저 먹으면서 다른 어린이들과 장난친다.

“선생님”하고 율법학자가 묻는다.“왜 어린 아이는 이미 무게를 느꼈는데, 저희들은 느끼지 못했습니까? 저는 바구니 속을 뒤지기까지 했습니다. 여전히 저 빵 몇 조각과 생선 한 조각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군중에게 가면서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준 분량만큼 무게가 나갔다면 그것을 운반하는 데는 노새 한 쌍은 필요했을 것이고, 바구니가 아니라 먹을 것을 잔뜩 실은 마차 한 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주고 또 주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공평하지 않기 위해서 첫번 사람들에게로 돌아오면서 또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번째 사람들에게는 별로 많이 주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넉넉히 있었습니다.”

“저도 가는 동안에 바구니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즉시 푸짐하게 주었습니다.” 하고 요한이 말한다.

“저는 반대로 걸음을 멈추고 앉아서 알아보려고 짐을 옷에 쏟았습니다.…그러나 빵이, 빵이 얼마든지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하고 마나엔이 말한다.

“저는 초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세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작은 빵이 쉰 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쉰 명에게 줘야지, 그리고 돌아와야지’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면서 주었습니다. 그러나 원까지 갔는데도 여전히 같은 무게였습니다.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만큼 그대로 있더군요. 그래서 앞으로 가면서 백 명씩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하고 바르톨로메오가 말한다.

“저는 믿지 않았다는 것을 자백합니다. 저는 빵 조각들과 그 조그만 생선덩어리를 손에 들고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이게 무엇에 쓰일 건가? 예수께서는 농담을 하려고 하신 거야!’ 그러면서 나무 뒤에 숨어서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마태오가 지나가면 말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았나?’‘뭐가 말이야?’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야 빵하고 생선 말이지!’…‘‥자네 미쳤나? 내게는 여전히 빵조각들이 보이는데?’ ‘믿음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게,그러면 알게 될 걸세.’ 저는 그 몇 조각을 바구니에 집어넣고 말을 하지 않고 갔습니다.…그랬더니…저는 죄인이니, 예수님, 용서하십시오!” 하고 토마가 말한다.

“아니다. 너는 세상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너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추론한다.”

“그럼 저두요, 주님” 하고 가리옷 사람이 말한다.“저는 심지어 빵조각과 돈 한 푼씩을 줄 생각까지 하면서 ‘저 사람들이 다른 데 가서 음식을 먹겠지’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더 훌륭하게 보이시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무엇입니까? 토마와 같습니까, 아니면 더합니까?”

“너는 토마보다 훨씬 더하다. 너는 바로 ‘세상’이다.”

“그러나 저는 하늘이 되기 위해서 애긍을 하려고 생각했는데요. 그것은 제 돈이었거든요….”

“너 자신과 네 교만에 하는 애긍이지 하느님께 하는 애긍은 아니다. 하느님께는 애긍이 필요 없고, 네 교만에게 하는 애긍은 죄가 되지 공로가 되지는 않는다.”

유다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문다.

“저는요” 하고 열성당원 시몬이 말한다.“저는 그 생선 한 조각, 그 빵조각들이 충분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가 더 잘게 쪼개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조각들이 수효와 영양가로는 충분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주시는 물 한방갈이 연회 한번 하는 것보다 더 영양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자네들은 무슨 생각을 했나?”하고 베드로가 예수의 사촌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가나의 일을 생각해 내고…의심을 하지 않았어.” 하고 유다가 정색을 하고 말한다.

“그럼 사촌 야고보, 너는 이 생각밖에 하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성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예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신다.“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실은 시몬이 말한 물 한 방울의 영양가에다 훗날의 상징에 대한 네 생각을 덧붙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성사가 아니다.”

율법학자는 빵부스러기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다.

“그걸로 뭘 할 거요?”

“기념…품이오.”

“나도 가지겠어. 난 이걸 작은 주머니에 넣어서 마륵지암의 목에 걸어 줄거야” 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나는 어머니한테 갖다 드릴 거야”하고 요한이 말한다.

“그럼 우리는? 우린 다 먹었으니 말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원통해서 말한다.

“일어들 나거라. 바구니들을 가지고 한바퀴 돌아서 남은 것들을 거두어 오너라.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갈라놓고, 바구니를 가져올 때에 이리로 데려오너라. 그리고 너희 내 제자들은 모두 배로 가서 먼 바다로 나가 겐네사렛 평야로 가거라. 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사람들을 떠나보내겠다. 그리고 너희들 있는 데로 가마.”

사도들은 순종한다.… 그래서 남은 것을 가득 채운 열 두 광주리를 가지고 돌아온다. 뒤에는 거지나 대단히 가난한 사람 30명가량이 따라온다.

“됐다. 이제는 가거라.”

사도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마나엔에게 인사하고, 예수를 떠나는 것을 좀 서운해 하며 간다. 그러나 순종한다. 마나엔은 예수를 떠나기 위하여 군중이 저녁의 마지막 희미한 빛을 받으며 마을들 쪽으로 가거나 키가 크고 마른 골풀 속에서 자려고 자리를 찾기를 기다린다. 그리고는 하직인사를 드린다. 율법학자는 그보다 먼저 떠났다. 그는 아들과 함께 사도들을 따라갔기 때문에 제일 먼저 떠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떠나거나 잠들었을 때 예수께서는 일어나셔서 자는 사람들에게 강복하시고, 천천히 호수를 향하여, 다리케아 반도를 향하여 가신다. 다리케아 반도는 마치 야산이 호수 안으로 쑥 내민 것같이 수면에서 몇 미터쯤 들려 있다. 그 밑에까지 오셨을 때 예수께서 시내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그 반도를 끼고 들으시면서 작은 산을 올라가셔서, 파란 호수와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달의 횐 빛을 마주 보시며, 기도를 하시려고 어떤 바위 위에 자리를 잡으신다.




5. 예수의 고통, 기도, 보속

예수께서는 지프타엘이 건설되어 있는 산 밑에 다시 와 계신다. 그러나 앞서 마차가 지나간 주요한 도로(이렇게 부르기로 하자) 또 노새가 다니기에 알맞은 길에 계시지 않으신다. 그렇지 않고 매우 가파르고 구멍과 깊이 갈라진 틈투성이인 사람이 걷기 어려운 험한 산길에 계신다. 그 산길은 산에 바짝 붙어 있는데, 괴물의 발톱으로 할퀸 듯이 깎아지른 암벽을 쪼아서 낸 것 같다. 암벽 반대편은 또 다른 심연으로 내려가는 구렁텅이로 경계가 지어졌는데, 그 구렁텅이 저 밑에는 요란스러운 급류가 된 거품을 일구고 있다. 거기서는 한 발만이라도 헛디디는 것은 희망없는 추락을 뜻한다. 이 가시덤불이나 다른 야생식물 덤불에서 튀어올라 다른 가시덤불이나 다른 야생식물로 떨어질 것이다. 그 나무들은 어떻게 났는지 바위틈에서 돋아나서 초목들이 보통 그러는 것처럼 수직으로 서 있지 않고 그 놈들의 위치가 강요하는 데 따라서 비스듬히 서 있거나 아예 수평으로서 있기도 한다. 한번 발을 헛디디는 것은 저 초목들의 빗살 같은 모든 가시에 몸이 찢어지거나 심연 위로 기울어져 있는 뻣뻣한 나무줄기의 충격으로 허리가 부러진다는 말이 된다. 한발 헛디디는 것은 낭떠러지의 암벽에 삐죽삐죽 나와 있는 날카로운 돌에 부딪혀 찢긴다는 뜻이 된다. 한발 헛디디는 것은 피를 흘리고 부러진 몸으로 요란스러운 급류의 거품이 이는 물에 가서 빠져서 세차게 흐르는 물이 후려갈기는 뾰족한 바위투성이인 밑바닥에 가라앉아있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이 산길을, 급류에서 뽀얗게 올라오고, 위쪽 암벽에서 스며나오고 약간 오목하다고 할 깎아지른 이 암벽에서 돋아난 나무들에서 떨어지는 습기로 인하여 한층 더 위험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이 산길을 걸어가신다.

예수께서 천천히 조심성 있게, 어떤 것은 흔들리는 뾰족한 돌을 담고 가는 발걸음을 세시면서 가신다. 때로는 길이 하도 좁아지는 바람에 암벽에 착 붙어서 가셔야 하고 또 극도로 위험한 통로를 건너가시기 위하여 암벽에 늘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으셔야 한다. 예수께서는 서쪽면을 이렇게 돌으셔서 남쪽면에 이르셨는데, 그 곳에서는 꼭대기에서 깎아지른 듯이 내려오던 산이 다른 데보다 더 오목하게 되어서 산길이 더 넓어진다. 그러나 그 대신 위쪽의 높이가 낮아져서 어떤 곳에서는 예수께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기 위하여 몸을 숙이고 걸어 나아가셔야 한다.

예수께서는 무너져 내린 돌더미 때문에 산길이 갑자기 끝나는 것 같은 곳에서 걸음을 멈출 생각이신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시다가 무너져 내린 돌더미 아래 동굴이, 아니 동굴이라기보다는 산이 갈라진 틈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그리고 무너진 돌더미 사이로 해서 그리로 내려가신다. 그리고 그리로 들어가신다. 처음에는 갈라진 틈이지만, 안으로는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나 아주 오래 전에 곡괭이로 산을 판 것 같이 넓은 동굴이다. 바위가 자연적으로 구부러진 곳에 사람이 만들어 놓은 구부러진 곳이 합쳐졌는데, 사람이 들어오는 쪽의 갈라진 틈과 반대되는 쪽에 일종의 좁은 복도를 파놓아서, 저 안쪽에는 띠 모양의 빛이 있고 거기에는 나무들이 보여, 그 복도가 어떻게 산의 돌출부를 남쪽에서 동쪽으로 자르고 들어오는지를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어둡고 좁은 그 복도로 들어가셔서 뚫린 구멍에 이르시도록 지나가신다. 그 뚫린 구멍은 예수께서 지프타엘에 올라가시기 위하여 제자들과 마차와 같이 걸어가신 길 위쪽에 있다. 예수의 정면으로는 계곡 너머로 갈릴래아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있고 동북쪽으로는 눈 덮인 대헤르몬산이 반짝인다. 원시적인 층계가 산허리에 파져 있는데, 산이 여기에는 깎아지른 것 같지도 않고 치받아도 내림받이도 없다. 그리고 이 층계는 계곡에 있는 노새가 다니기에 알맞은 길로 연결되고 지프타엘의 소도시가 있는 꼭대기에도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답사에 만족하신다. 다시 넓은 동굴 속으로 돌아오셔서 잘 가려진 곳을 찾아서, 바람에 불려 동굴 안으로 들어온 마른 잎들을 쌓아 놓으신다. 예수의 몸과 아무 것도 없는 찬 땅바닥 사이에 마른 잎을 한 겁 쌓은 매우 보잘 것 없는 침대이다. …예수께서는 그 위에 쓰러지셔서 손을 머리 밑에 넣으시고 둥근 바위 천장을 똑바로 쳐다보시며 생각에 감긴 채 꼼짝하지 않고 누워 계신다. 힘에 부치는 노력이나 고통을 견디어낸 사람처럼 정신이 멍하신 것 같다. 그러더니 흐느낌 없이 눈물이 천천히 눈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얼굴 양쪽으로 흘러내려 귀 쪽에 있는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는데, 마침내는 틀림없이 마른 잎까지 내려갈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말씀도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으시며 우신다. …그리고 일어나 앉으셔서 무릎을 세우시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으시고 깍지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시고는 멀리 떨어져 계신 어머니를 마음을 다하여 부르신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 영원한 즐거움! 오! 어머니! 오! 어머니! 오! 어머니께서 아주 가까이에 계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하느님의 유일한 위안이신 어머니를 항상 모시지를 못합니까?”

동굴의 공동(空洞)만이 불완전한 메아리의 중얼거림으로 예수의 말씀과 흐느낌에 대답하는 것 같고, 동굴도 가장 구석진 곳과 바위와 아마 지하수의 작용에 제일 많이 노출된 구석에 매달려 있는 종유석(鐘乳石)으로 흐느끼는 것 같다.

예수의 울음은 비록 어머니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으신 듯 더 조용하기는 하지만 계속된다. 그리고 천천히 혼자 말로 변한다.

“그들은 떠났다. …그런데 왜? 또 누구를 위하여? 왜 나는 그 고통을 주어야 했나? 그렇지 않아도 벌써 세상이 내 하루를 고통으로 가득 채우는데. 왜 나 자신에게 그 고통을 주어야 했나? … 유다!…”

무릎에서 머리를 드시고, 미래의 정신적인 광경이나 큰 명상에 몰두한 사람과 같이 동공이 확장된 눈으로 얼굴을 내밀고 앞을 쳐다보시는 예수의 생각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다 “이제는 울지 않으신다. 그러나 눈에 보이게 괴로워하신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대화자에게 대답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일어서신다.

“아버지 저는 인간입니다. 저는 사람입니다. 제 안에서 상처 입고 찢어진 우정의 덕행이 몸을 비틀고 고통스럽게 신음합니다….

제가 모든 것을 참아견디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저도 압니다. 하느님으로서 제가 그것을 알고, 또 세상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으로서 그것을 원합니다. 사람으로서도 그것을 압니다. 그것은 제 하느님으로서의 영이 제 인성에 그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도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정말 매우 괴롭습니다!

이 시간은 제가 광야에서 아버지의 영과 제 영으로 산 그 시간보다도 훨씬 더 괴롭습니다.…그리고 제게 톡톡히 맛보게 하고 가득 채우는 큰 고통, 제가 평화를 준 영혼들을 괴롭히는 큰 고통의 원인인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메스꺼울 지경이고  삐뚤어진 인간을 사랑하지 말고 제 곁에 용납하지 말라는 지금의 유혹은 훨씬 더 강합니다.

아버지, 저는 그것을 느낍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인류를 위하여 제 것으로 삼는 이 속죄의 기한이 다가옴에 따라서 아들에 대하여 더 엄하게 되십니다. 아버지의 다정스러우심은 점점 더 제게서 멀어지고, 아버지의 얼굴은 제 영에 엄하게 나타나십니다. 제 영은 저 깊은 곳으로, 아버지의 벌을 받은 인류가 수천 년째 신음하고 있는 그곳으로 점점 더 밀려나고 있습니다.

괴로움이 제게는 즐거웠고, 제 인생의 시초에는 길도 즐거웠고, 떨어진 사람에게 아버지를 주기 위하여 어머니를 억지로 떠나서 목수의 아들에서 세상의 선생이 되었을 때에도 제 생활은 즐거웠습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당할 때에 원수와의 싸움도 지금과 비교하면 기분좋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힘을 가진 용사로서 과감하게 그 싸움을 감행했습니다.…오! 아버지!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없고, 너무나 많은 사람과 너무나 많은 일을 아는 것으로 인해서 제 힘이 둔해졌습니다….

사탄이 떠나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혹이 끝난 다음에는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유혹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에 대해서 아버지의 아들을 위로하려고 천사들이 왔습니다.

그러나 친구가 멀리 보내진 친구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자기를 가까이에서나 멀리서 해치는 믿지 못할 친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시간이 지나가면 유혹이 멎지 않을 것입니다. 유혹이 멎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간에, 또 그 시간이 지난 후에 저를 위로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천사들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오지 않고, 세상이 그의 온갖 증오와 조소와 몰이해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못할 사람, 배신자, 사탄에게 매수된 사람이 올 것입니다. 점점 더 가까이 점점 더 삐뚤어지고 점점 더 메스꺼울 지경이 되어 올 것입니다. 아버지!”이 부르짖음은 참으로 비통하고, 공포의 부르짖음이고 호소이며, 예수의 마음의 동요는 게써마니의 시간을 연상시킨다.

“아버지! 저는 그것을 압니다.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괴로워하고 장차도 괴로워하겠고 또 제 고통을 그의 회개를 위하며, 그리고 제 품에서 억지로 떼어내져서 꿰뚫린 심장을 안고 그들의 운명을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는 동안, 그 사람은 사람외아들인 저보다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기를 팔고 있습니다!

제가 사람의 아들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만이 사람의 아들이 아닙니다. 인류는, 생식력이 강한 하와는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죄없는 아벨입니다마는 인류의 후예 중에는 카인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버지의 눈으로 볼 때 흠 없는 사람의 아이들이 그랬어야 할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맏아들이지마는, 죄 중에 태어난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독이 든 열매를 깨문 다음에 된 것과 같은 사람들 중의 첫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안에 혐오감을 주는 요소와 거짓말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과 반애덕(反愛德), 피에 굶주림, 돈에 대한 탐욕, 교만과 음란을 가지는데 그치지 않고, 천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인데도 마귀 같은 사람이 되려고 사탄이 되어갑니다.” ‘그리하여 루치펠(Lucifer 마귀의 두목.)은 하느님과 같게 되기를 원하였고, 그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나 마귀가 되어 지옥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오! 아버지!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저는 그 사람을 아직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입니다. …그는 제가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를 떠난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모욕을 당하는 대신에 그를 구해 주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제게 그를 구속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이 보속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그 사람을 위하야 하는 것입니다! 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두 알고 있는 저는 제가 청하는 것이 모순임을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 잠깐 동안만 저를 아버지의 ‘말씀’으로 보지 마십시오. 의인으로서의 제 인성(人性)말을 보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의 덕택으로 다만 ‘사람’이 되게, 미래를 알지 못하고 착각할 수 있는 사람…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에게서 기적을 억지로 얻어내려고 절대적인 바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기적을! 나사렛의 예수를 위하여,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나사렛의 마리아의 예수를 위하여 기적을! 표시가 된 것을 무시하고 무효하게 만드는 기적을! 유다의 구원을! 그는 제 곁에서 살았고, 제 말을 받아들였고 저와 같이 음식을 먹었고 제 가슴에 안겨 잠을 갔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게, 그 사람이 제 사탄이 아니게 해 주십시오!…

저는 배신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사고 아버지께 청하지 않습니다…. 배반을 당한 사람으로서의 제 고통으로 모든 거짓만이 취소되기 위하여, 팔린 사람으로서의 제 고통으로 모든 인색히 속죄되기 위하여, 모독하는 말을 들은 이로서의 제 극심한 고통으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모든 말이 갚아지기 위하여,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극심한 고통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과 장차 믿음이 없을 사람들에게 믿음이 주어지기 위하여 제 고통으로 육신의 모든 죄가 깨끗해지기 위하여…제가 배반을 당해야 하고 또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발 제 친구요, 제 사도인 유다 그 사람이 아니게 해 주십시오!

저는 아무도 배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아무도…북극의 빙원(氷原)과 적도지방의 불볕 속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까지도…저는 제물을 바치는 분이 아버지 한 분뿐이시기를 바랍니다… 전에 아버지의 불로 번제물(燔祭物)을 불사르심으로 제관이 되신 것처럼… 그러나 제가 사람의 손으로 죽게 되어 있는 만큼, 또 친구인 배반자, 그의 안에 사탄의 악취를 간직하고 있고, 저와 능력이 같아지기 위하여 벌써 사탄을 빨아들이고 있는 - 그 교만과 갈망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사람이 진짜 사형집행인보다 더 냉혈한(冷血漢)일 것인 만큼…제가 사람의 손으로 죽게 되어 있는 만큼, 아버지, 제가 친구라고 불렀고 또 그런 사람으로 사랑한 그 사람이 배반자가 되지 않게 하는 은혜를 제게 내려주십시오.

아버지, 제 고통을 더 늘리십시오. 그러나 유다의 영혼을 제게 주십시오. …저는 이 기도를 제물이 된 제 제대 위에 바칩니다. …아버지, 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하늘은 닫혀 있고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제 가죽을 때까지 제가 가지게 될 공포입니까?

하늘은 말이 없고 닫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제 희망이 그 안에서 사라질 침묵이고 감옥입니까?

하늘은 닫히고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순교자의 최후의 고통이겠습니까? …아버지, 제 뜻 말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제가 받는 고통 때문에, 오!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제가 받은 고통 때문에 유다의 또 다른 박해받는 사람인 엔도르의 요한에게 평화와 꿈을 주십시오 아버지… 요한은 실제로 많은 사람보다 낫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또 정차도 별로 없을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의 경우에는 구속에 관한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충만하고 완전한 평화를 주시어, 제게 있어서도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제 영광중에 그를 데리고 있어 아버지를 공경하고 아버지께 순종하도록 해주십시오. …아버지 !…”

예수께서는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 무릎을 꿇으시고 이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신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짧은 겨울 해의 빛이 어두운 동굴 안에서 시간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고 급류의 요란한 소리는 어두움이 계곡을 감싸는 데 따라서 더 세어지는 것 같다.




  67.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않은 일에 골몰하는구나”

  나는 우리가 아직도 막달라 마리아의 인물 주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접시꽃처럼 라일락를 빛깔의 소박한 옷을 입은 마리아가 제일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값진 장식도 없다. 머리를 그저 목덜미 위에 땋아 늘이기만 하였다. 마리아는 진짜 화장의 걸작품이던 시절보다도 더 젊어 보인다. 그는 “죄녀”이던 시절의 뻔뻔스러운 눈길도, 길 잃은 양의 비유를 듣던 때의 모욕당한 눈길도, 그가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의 큰 방에 있던 날 저녁 눈물에 젖은 부끄러운 눈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은 어린아이의 눈과 같이 다시 맑게 되고, 평화가 가득한 미소가 빛나는 평온한 눈을 가지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베다니아 소유지의 경계에 있는 나무에 기대서서 길 쪽을 바라다보며 기다린다. 그러다가 기쁨의 함성을 지른다. 집 쪽으로 돌아서서 사람들이 듣도록 아주 큰소리로 외친다. 그의 독창적인 부드럽고 정열적인 훌륭한 목소리로 외친다.

“오신다! …언니, 그 사람들이 제대로 말했어. 선생님이 여기 오셨어!”

  그리고 뛰어 가서 삐걱거리는 무거운 대문을 연다. 그는 하인들에게 그렇게 할 시간을 주지 않고, 엄마에게로 가는 어린아이처럼 팔을 내밀고 애정 어린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행길로 나가면서 외친다.

“오 선생님!”

  그리고는 예수의 발 앞에 엎디어 길의 먼지 속에서 발에 입맞춤한다.

“마리아, 네게 평화. 너희 집에 쉬러 온다.”

“오 선생님!”

  마리아는 존경과 사랑의 표정이 나타나는 얼굴을 들면서 거듭 말한다. 그 표정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그것은 감사이고, 축복이고, 기쁨이고, 들어오시라는 초청이고, 들어오시기 때문에 느끼는 그지없는 기쁨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다시 그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 같다.

  마리아는 일어나, 예수 곁에서 소유지의 경내로 들어간다. 그동안 하인들과 마르타가 달려 왔다. 하인들은 항아리와 컵들을 가지고 오고, 마르타는 다만 사랑만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 사랑은 대단히 크다.

  몸이 더워진 사도들은 하인들이 주는 시원한 음료를 마신다. 그들은 우선 그것을 예수께 드리고자 하였으나, 마르타가 그들을 앞질렸다. 마르타는 양젖 한 컵을 갖다 예수께 드린다. 마르타는 그것이 매우 예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제자들이 목을 축인 다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신자들에게 가서 알려라. 오늘 저녁 여기서 말하겠다.”

  사도들은 정원에서 나가자마자 사방으로 흘어진다.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사이에서 걸어가신다.

“선생님, 이리 오십시오”하고 마르타가 말한다.“오빠를 기다리시는 동안 뭘 좀 드시고 쉬십시오.”

  그들이 그늘진 회랑 쪽으로 향해 있는 시원한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빨리 물러갔던 마리아가 물병을 가지고 돌아오고, 뒤에는 대야를 든 하인이 따른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씻어 드리기를 원한다. 마리아는 먼지투성이의 샌들 끈을 풀어서 깨끗이 해서 가져오라고 하인에게 주고, 동시에 예수의 겉옷도 먼지를 털어 오라고 준다. 그리고는 향료로 인하여 약간 볼그레하게 된 물에 발을 담그고, 닦고, 입맞춤한다. 그런 다음 물을 갈아 손을 씻을 깨끗한 물을 가져온다. 샌들을 가지고 올 하인을 기다리는 동안, 예수의 발 앞에 양탄자에 쪼그리고 앉아 그 발을 어루만지며, 샌들을 신켜 드리기 전에 또 발에 입맞춤하며 말한다. “저를 찾느라고 그렇게도 많이 걸으신 거룩한 발!”

  사랑에 있어서 더 실제적인 마르타는 인간적으로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묻는다. 

“선생님, 제자들 외에 누가 또 옵니까?”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도들 외에 다섯 명 물만 준비하면 된다.”

  마르타는 간다.

  예수께서는 그늘이 져서 시원한 정원으로 나오신다. 짙은 파란색 옷만 입고 계시다.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개켜 놓은 겉옷은 방안의 걸상에 그대로 있다. 마리아도 예수와 함께 나온다. 그들은 꽃이 핀 화단들 사이로 나 있는 손질이 잘 된 통로를 지나, 푸르름 가운데 떨어진 거울과 같은 양어지(養魚池)까지 간다.

  매우 맑은 물은 고기가 팔딱거리는 것이나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에서 떨어지는 아주 가는 물방울들로 겨우 움직인다. 큼직한 수반 곁에는 의자들이 있다. 수반은 작은 연못 같고, 거기에서 작은 관개수로(灌漑水路)들이 시작된다. 내 생각에는 그 수로 중의 하나는 양어지에 물을 대주고, 더 작은 다른 수로들은 관개를 위한 배수에만 소용되는 것 같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바로 수반 전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으신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손질이 잘된 파란 풀밭에 앉는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말이 없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서늘한 정원 안에서 고요와 휴식을 즐기신다. 마리아는 예수를 쳐다보는 것을 매우 즐긴다. 예수께서는 수반의 물을 가지고 장난하신다. 물에 손가락을 담그시고, 빗질하듯 작은 물줄기로 갈라놓으신다. 그런 다음 시원한 물속으로 손이 완전히 잠기게 하신다. “이 맑은 물은 정말 아름답구나!”하고 말씀하신다.

“선생님, 그 물이 그렇게도 마음에 듭니까?”

“그렇다. 마리아야, 아주 맑으니까. 봐라, 진흙 흔적 하나도 없다. 이것은 물이다. 그러나 너무 맑아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이 물이 원소가 아니라 영인 것같이 말이다. 우리는 저 밑에서 작은 고기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영혼들의 속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선생님?”

  마리아는 숨겨진 한을 가지고 한숨을 쉰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억제하는 한숨을 눈치 채시고, 미소로 가려진 회한을 읽으신다. 예수께서는 이내 마리아의 마음 괴로움을 고쳐 주신다.

“마리아야, 깨끗한 영혼들이 어디 있느냐? 한 인간이 세 가지 더러움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유지할 줄 아는 것보다 산이 위치를 바꾸는 것이 더 쉽다. 어른 주위에서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심하게 움직이고 술렁인다. 그리고 어른은 그것들이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언제나 막을 수는 없다. 어린이들만이 천사 같은 영혼을, 타락한 상태로 변할 수 있는 지식에서 그들의 순진함으로 보호된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내가 어린이들을 몹시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무한한 순결의 반영을 본다. 하늘의 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오직 어린이들뿐이다.

  내 어머니는 어린이다운 영혼을 가진 분이시다. 그보다도 한층 더하다. 내 어머니는 천사다운 영혼을 가진 분이시다. 아버지의 손에서 방금 나온 하와와 같은 분이시다. 마리아야, 지상 낙원에 피었던 첫번째 백합꽃이 어떠했는지 상상하느냐? 이 물 있는 데까지 오는 곳에 있는 백합꽃들도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첫번째 백합꽃은! 그것이 꽃이었느냐, 금강석이었느냐? 그것은 꽃잎들이었느냐, 지극히 순수한 은잎이었느냐? 내 어머니는 바람을 향기롭게 한 그 첫번째 백합꽃보다도 더 깨끗하시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상 없는 동정녀의 향기는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영원무궁토록 착한 사람으로 있을 사람들이 내 어머니 뒤를 따라 걸을 것이다.

  천국은 빛이고 향기이고 조화이다. 그러나 만일 그 천국에서 아버지께서 세상을 낙원으로 변하게 하시는 지극히 아름다우신 분을 봄으로 즐길 수 없다면, 만일 천국이 미래에 빛과 향기와 조화라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불로 된 세 개의 꽃술을 가진 살아 있는 백합꽃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 있다면, 천국의 기쁨은 반은 줄어들 것이다. 어머니의 순결은 천국의 보석일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끝이 없다! 국고에 보석 한 개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왕을 너는 무엇으로 보겠느냐? 그것이 아주 훌륭한 보석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하늘나라의 문을 열면… - 마리아야, 한숨짓지 말아라. 나는 이 때문에 온 것이다- 많은 의인과 어린이로 이루어진 순진한 무리가 구세주의 주홍빛 옷을 따라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보석을 가득 채우고, 영원한 예루살렘의 시민을 만드는 데에는 그 수가 아직 너무 적을 것이다. 또… 진리와 성화(聖化)의 가르침이 알려지고, 내 죽음이 사람들에게 은총을 다시 주었을 때, 만일 보잘 것 없는 인간생활이 계속 더럽게 하는 진흙이라면, 어른들은 어떻게 하늘나라를 쟁취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내 천국은 오직 어린이들만의 것이 되겠느냐! 오! 그렇지 않다! 어린이가 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도 내 나라의 문이 열려 있다.”

“어린이들과 같이…이것이 순결이다. 너는 이 물을 보느냐? 이 물은 아주 깨끗해 보인다. 그러나 살펴보아라. 내가 골풀로 밑을 휘젓기만 하면 흐려진다. 찌꺼기와 진흙이 떠오른다. 수정같이 밝던 것이 탁해지게 되고, 아무도 이 물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골풀을 치우면, 평화가 돌아오고, 물이 차차 맑아지고 아름다워진다.

  골풀은 죄이다. 영혼들도 이와 같다. 뉘우침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라….”

 

  느닷없이 마르타가 숨이 턱에 닿아서 온다.

“마리아야, 너 아직 여기 있니? 나는 이렇게 걱정을 많이 하는데! …시간은 자꾸 흐르고, 손님들은 곧 올텐데, 할 일은 태산 같다. 하녀들은 빵을 굽고, 하인들은 고기를 잘라서 익히고 있다. 나는 식탁보와 식탁과 음료를 준비한다. 그러나 아직 과일도 따야 하고, 박하와 꿀을 탄 물도 준비해야 한다….”

  마리아는 언니의 탄식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지극히 행복한 미소를 띠고 예수를 계속 쳐다보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마르타는 예수의 도움을 구한다.

“선생님, 제가 얼마나 열이 올라있는지 보세요. 준비를 저 혼자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선생님이 얘더러 절 도우라고 말씀하세요.”

  마르타는 정말 화가 났다. 예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마르타를 바라다보신다. 그 미소는 반은 부드럽고, 반은 약간 비꼬는 또는 좀 비웃는 것 같은 미소이다. 마르타는 약간 기분이 상한다.

“선생님, 저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일을 하는 동안 얘는 얼마나 한가로이 있는지 보세요. 그리고 얘는 여기서 쳐다보고만 있어요….”

  예수께서는 더 근엄한 태도를 취하신다.

“마르타야, 이것은 한가함이 아니라, 사랑이다. 한가함은, 전에는 그랬다. 그리고 너는 그 마땅치 않은 한가함 때문에 많이 울었다. 네 눈물 때문에 마리아를 내게로 구원해오고, 네 성실한 애정에 돌려주기 위한 내 발걸음이 한층 더 빨라졌었다. 너는 마리아가 그의 구세주에 대해 가지는 사랑을 떼어 놓고 싶으냐? 너는 그러면 마리아가 너 일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여기서 멀리 떠나는 것이 더 좋겠느냐? 그러나 또한 내게서도 멀리 떠나는 것이 더 좋겠느냐?

  마르타야, 마르타야! 도대체 멀리서 온 마리아가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머리에 손을 얹으신다) 사랑에 있어서 너를 앞질렀다는 말을 네게 해야 하겠느냐? 도대체 선의 말은 한 마디도 알지 못하던 마리아가 이제는 사랑의 지식에서 유식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해야 하겠느냐?

  마리아가 평화를 누리게 내버려두어라! 마리아는 너무도 중병을 않았다. 이제는 그를 튼튼하게 하는 음료를 마셔서 건강을 회복하는 회복기이다. 마리아는 몹시도 고통을 당했다. …이제는 악몽에서 깨어나 그의 둘레와 자기 마음속을 보고, 자기가 새로워진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거기 대해 안심할 수 있게 내버려두어라. 마리아는 그의 ‘새것’을 가지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영원을 쟁취해야 한다.…영원은 일로 쟁취될 뿐 아니라, 흠숭으로도 얻어질 것이다.

  …사도나 예언자에게 빵을 준 사람도 상을 받겠지마는,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는 것조차도 잊은 사람은 상을 곱절 받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육체보다 더 훌륭한 영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합법적인 욕구보다는 더 크게 소리친 영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타야, 너는 너무 많은 일에 골몰한다. 마리아에게는 한가지 일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영에 그리고 특히 네 주님이기도 한 그의 주님에게 충분한 것이다. 쓸데없는 것들을 집어치우고, 네 동생을 본받아라.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골랐다. 그에게서 결코 빼앗아지지 않을 몫이다.

  하늘나라의 시민들에게는 그것들이 필요 없겠기 때문에 모든 덕행이 지나쳐진 다음에 홀로 남아 있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홀로 지상(至上)의 것으로. 마리아는 그것을 골라잡았고, 그것을 방패와 창으로 삼았다. 사랑을 가지고 마리아는 천사의 날개를 한 것처럼 내 하늘에 이를 것이다.”

  마르타는 자존심이 상하여 머리를 숙이고 간다.

“제 언니는 선생님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마르타를 변명하느라고 말한다.

“나도 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상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타는 이 물이 깨끗해진 것처럼, 그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서 깨끗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 물이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보아라. 마르타는 내가 해준 말 덕택으로 깨끗해질 것이다. 너는… 너는 네 진실한 뉘우침으로….”

“아닙니다. 선생님의 용서로 깨끗해질 것입니다. 제 뉘우침은 제 큰 죄를 짓는데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너를 본받을 네 모든 자매들에게도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병을 지닌 가엾은 모든 병약자들에게. 진실한 뉘우침은 깨끗하게 하는 여과기(濾過器)이다. 그런 다음 사랑은 일체의 새로운 오점을 예방하는 실체이다. 이것이 생활로 인해서 어른이 되고 죄인이 된 사람들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다시 죄 없는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들과 같이 내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이유이다.

  이제는 집으로 가자. 마르타가 너무 그의 고통 속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자. 마르타에게 친구와 동생으로서의 우리의 미소를 가져다주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설명이 필요 없다. 물의 비유는 마음속에서 뉘우침이 작용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이렇게 해서 너는 막달라 마리아의 과정(過程)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 오는 과정을 마리아는 내 복음에서 부활한 사람 중에서 가장 큰 부활자이다. 마리아는 일곱 가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마리아는 생명으로 돌아왔다. 너는 마리아가 어떻게 화초처럼 그 새 꽃줄기를 진흙에서 점점 더 높이 쳐들고, 그 다음에는 나를 위하여 꽃이 되고, 나를 위하여 향기를 내뿜고, 나를 위하여 죽는지를 보았다. 너는 마리아가 죄녀였다가 목이 말라 샘에 가까이 왔고, 그 다음에는 뉘우치고, 용서를 받고, 그 다음에는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그의 주님의 생기가 없는 육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그 다음에는 내 어머니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어머니의 하녀가 되고, 그리고 그의 천국의 문턱에서 속죄하는 것을 보았다.

  두려워하는 영혼들아, 막달라의 마리아의 전기를 읽으면서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라.

  사랑하는 영혼들아, 막달라의 마리아에게서 천사 같은 열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방황하는 영혼들아. 막달라의 마리아에게서 하늘에 가는 준비를 하는 지식을 배워라.

  나는 너희들이 너희 자신을 향상시키도록 모두에게 강복을 준다.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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