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레지나의 묵상글

미리 잡아 죽일 놈?

김레지나 2008. 8. 28. 19:25

미리 잡아 죽일 놈?

 

작년에 수술을 앞두고 병자성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까지는 수십 년간 늘상 하던 대로의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제가 하느님의 사랑을 뼈저리게 알게 되면서‘죄’에 대한 개념이‘계명을 어긴 것’이라기보다는‘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수많은 기억들로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모릅니다.

 

이번 사순절에 총고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다시 죽음을 앞두게 될 때 성찰을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의 일들을 다시는 묻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실 것을 생각하니 미리부터 감격스러워 가슴이 뛰었습니다. ‘천주교와 고해성사’, ‘고해성사 길잡이’, ‘영혼의 성약’ 등의 책을 보면서 꽤 오랜 기간 제 삶을 성찰하였습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모든 자잘한 일들이 수도 없이 새롭고 아프게 떠올랐습니다. 종이에 적어보니 끝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껏 무엇을 성찰해야 되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겁니다.

 

15년 전쯤부터 한 3년간 통근하느라 매일 세 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했습니다. 좁은 일차선 국도에는 아침마다 안개가 자주 끼었고 언덕길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꼬불꼬불 위험한 재를 둘이나 넘어야했습니다. 또 저녁 7시까지 자율학습 지도를 해야 했기 때문에 퇴근길은 늘 깜깜했습니다. 물감으로 ‘왕초보’라고 큼지막하게 써서 꽤 오래 차 뒤에 붙이고 다녀서 놀림도 많이 받았지요. 운전실력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제 딴에는 모범적으로 운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긴 시간을 운전하다 보면 가슴을 쓸어내릴 위험한 상황이 많을 수밖에요. 매 주 한 대 꼴로 박혀 있는 사고 난 차들을 볼 때마다 바짝 긴장이 되었지요. 카풀 하는 동료들과 잡담을 하다가도 운전을 제멋대로 하는 차가 보이면 화가 잔뜩 나서 욕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아니, 저런 나쁜 놈, 고갯길 정상에서 반대편이 보이지도 않는데 추월을 하다니, 그러다가 마주 오는 차와 부딪치면 추월한 놈이야 자업자득이지만 마주 오던 차는 잘못도 없는데 죽게 되잖아. 죽으려면 지 혼자 죽을 일이지 애먼 사람까지 죽이려고? 저렇게 운전하는 놈들은 큰 사고 내서 여럿 죽이기 전에 미리 잡아 죽여야 돼.”라는 식이었지요.

 

어디 그 뿐입니까? 뉴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을 볼 때면 몸서리치며 생각합니다. ‘저 죽일 놈, 사형제도가 없어지면 세상에 겁날 것이 없어서 저런 놈들 더 많아질 텐데, 저런 놈들 때문에 사형제도 없어지면 안 되겠어. 이 사형을 시켜도 시원찮은 놈’이라구요. 그런 식으로 욕을 해대면서도 저는 제가 정의감이 남달라서 쉽게 흥분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언젠가 일본이 바다 속에 가라앉는 상황을 그린 영화를 학생들과 함께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인 난민들을 받아주겠다는 나라가 적어서 이주할 사람들을 가려 뽑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서야 일본 땅의 일부라도 침몰을 막아보려는 작전이 성공했습니다.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저런, 일본 놈들 다 죽어야하는데 작전이 성공해버렸네.” 주인공들이 죽음을 준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도 그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스릴을 느끼며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 학생을 나무랐지만 저 자신도 그 학생과 비슷한 잘못을 저질러왔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과거의 일본 사람들이 큰 잘못을 했다고 해서 지금의 일본 사람들을 다 죽일 놈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게 운전하는 사람이나 살인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도 미리 잡아 죽이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고들 하지만, 과거로 미래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제가 “미리 잡아 죽일 놈”이라고 욕해댈 때 하느님께서 저를 보시고 “저런 맹랑하고 건방진 놈, 네가 욕하는 사람도 내 자식이거늘, 네 눈에 들보나 먼저 빼라”하고 속상해하셨을 게 분명합니다. 저는‘한 사람도 예외 없이’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우리 모두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린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의 큰아들 모습이 제 모습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동생을 냉정하게 단죄했으니 방탕한 동생 못지않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겠지요. 정작 아버지한테 돌아가서 그 품에 안기기 힘든 사람은 작은 아들이라기보다 큰 아들이라지요. 제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기준삼지 못한 죄 또한 통회할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미리 잡아 죽일 놈’이라는 욕설이 하느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 죄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사회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쉽게‘죽일 놈 살릴 놈’하고 증오하는 마음은‘나는 저렇지 않은데, 저 사람은 왜 저럴까?’하는 교만에서 나온다지요? 살면서 무심코 하는 사소한 욕설들, 불평들이 모두 다 제 교만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 뒤늦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빠 하느님께서 못난 저를 기다려주셨듯이 저 또한 못마땅한 이웃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기도할 줄 아는 인내심을 갖고 싶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다 제가 거저 받은 은총일 뿐이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니까요.

 

오프라 윈프리는 자서전에서 그녀의 인생철학을 이렇게 밝혔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주님, 제가 잘못했어요. 그동안 교만했어요.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어요. 제가 가진 장점들이 다 제가 잘난 탓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네요. 제가 남보다 더 바르게 살고 있다면 그건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제 사명일 뿐이고, 제가 남보다 더 즐겁게 살고 있다면 그건 그저 누리기만 할 축복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사명일 뿐이에요. 제가 남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면 그 또한 저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라는 제 사명이지요. 그런데도 저는 제가 거저 받은 것들에 대해서 크게 감사할 줄도 몰랐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만 삼았어요. 죄송해요. 제가 제 사명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세요. 저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서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을 깨닫게 도와주세요.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니면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더 잘 깨닫게 해주세요. 다른 이들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도록 제 굳은 마음을 고쳐주세요. 이제라도 제가 뉘우치게 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요. 근데 예수님, 지금까지의 잘못들에 대해 저를 또 탓하시면 규칙위반이라는 것 아시지요? 우리를 위해서 고해성사를 만들어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터무니없이 쉽게 용서받는 그 엄청난 은총에 대해서 매번 감사할 줄도 몰랐네요. 그것도 죄송해요. 예수님, 앞으로 잘할게요. 욕하고 불평하는 대신 사랑으로 기도할게요. 진짜진짜 고마워요.”

 

      2007년 엉터리 레지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