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레지나의 묵상글

레지나야,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단다

김레지나 2008. 8. 28. 19:23

레지나야,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단다.

화창한 주말입니다. 애들 학교에 보내놓고 냉장고에 반찬도 넉넉한데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몇 주 전부터 목욕탕 천정에 붙여놓았던 벽지가 떨어져서 축 늘어져 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한 달 쯤 전에 집안 여기 저기 더러워진 부분에 6년 전 도배하고 남은 벽지를 손수 붙였습니다. 애들이 어릴 때 여기 저기 낙서해 놓은 부분들이 많았지만 새로 도배를 하자니 돈 들고 귀찮은 일이었지요. 더구나 6년 전에 쓰고 남은 벽지가 있으니, 그걸 이용하는 게 돈도 아끼고, 지구환경을 보호하는 길이라는 기특한? 생각을 했던 거지요. 게다가 새로 도배하면 환경호르몬 때문에 아픈 저한테 해롭기도 하구요. 목욕탕 천정에도 곰팡이가 슬었는데, 천정이라 도배하기 어려울 것 같아 도배집에 맡기려고 물어보니 삯만 이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근데 그 이만원이 아깝기도 하고 여기 저기 도배하는 김에 같이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500원짜리 풀 두 봉지와 2000원짜리 붓을 사들고 돌아 와서 난생 처음 벽지를 발라보았습니다. 돈을 아낀다는 생각에 재미는 있었지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풀을 먹은 종이는 축 늘어져서 제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성의 없이 대충 붙였기 때문에 목욕탕 천정의 벽지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이 떨어졌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오늘은 맘먹고 늘어진 벽지를 잘라내 버리고, 남은 벽지를 재단해서 붙였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더기 기워놓은 것처럼 조각조각 벽지가 덧대어져있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 저기 벽지가 쭈글쭈글하게 붙어있지만 더러워진 부분이 감추어지니 전보다 훨씬 나아 보입니다. 저 혼자서야 누더기 같은 벽이 재미있어서 웃고 말지만, 어려운 손님이 오시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됩니다. 이사 올 때 빚을 좀 더 내서라도 거실에 몰딩도 하고, 좋은 벽지를 쓸 걸,하고 뒤늦은 후회도 해봅니다. 평소에도 집단장에 전혀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불쑥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정말 부답스럽습니다. 성당 반모임에 가봐도 우리집처럼 전혀 리모델링이 안 되어 있는 집도 없습니다.

   

저번 반모임에서 파티마 순례 성모상을 집에 모시는 이야기를 했습니다.“아, 파티마 성모님, 엄마.” 마음 속으로 불러보았습니다. k 선생님은 주말을 이용하고, 하루 연가를 내서까지 성모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좋으셨어요?” 하고 물으니 환하게 웃으면서 “응, 너무 행복했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선생님의 행복이 전해져서 제 마음이 환해졌었습니다.

저는 ‘그래, 언제 다시 성모상이 우리 본당 교우가정을 순례할지 모르는데, 휴직 중에 안 모시면 평생 그런 기회가 언제 오겠어? 우리 집에 모시겠다고 할까?’망설였습니다. 그런데 신경 쓸 일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기도하러 오신 분들한테 무슨 차를 드리지? 커피도 사 놓아야겠네. 간식이라도 준비하려면 얼마나 들까? 집에 있는 찻잔들이 몇 개 되지도 않은데,.. 베란다에 쌓여 있는 빈 화분들은 어디다 치울까? 오신 분들이 목욕탕 천정은 안 쳐다봤으면 좋겠는데. 꽃도 꽂는 게 좋은데. 꽃병도 없네, 우유병으로 할까? 하얀 제대보도 없는데 사기는 그렇고, 어디서 빌릴까?’ 그런 걱정들이 떠오르자 얍삽한 생각이 이어졌습니다.‘아니, 순례 성모상을 우리 집에 모셔야만 성모님이 은총을 주시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언제나 우리의 엄마이신데. 머리 무거우니 다른 교우집에 모여서 기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구역장님이 “레지나 집에 모시는 게 어때?”하고 권하셨지만 “글쎄요. 좀 힘들 것 같아요. 저희 구역교우님들 집에 오시면 열심히 기도하러 다닐게요.”라고 거절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영 찜찜했습니다. 제가 성모상을 모시기를 거절한 이유는 엉망인 우리집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고, 남편의 명예퇴직으로 살림살이가 기약 없이 빠듯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순례성모상을 우리 가정에 모시고, 교우들과 함께, 가족과 함께 특별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이그, 나도 정말 한심하기도 하지. 이번 기회에 마음을 단정히 할 생각은 안하고, 남들한테 보이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으니, 나도 참 바보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예수님과 성모님을 맞대고 볼 텐데, 세상 지나갈 것들에 여전히 더 마음을 쓰고 있으니. 죽어서 성모님을 만날 준비라고 생각하고, 이참에 아주 특별한 예행연습을 하는 거야. 우리 가정을 오롯이 봉헌하고 영적 꽃다발을 많이 드려야지. 그래, 바보 같은 생각 그만하고, k선생님 말씀처럼 2박 3일간의 특별한 행복을 준비해야지. 성모님과 찐하게 데이트하는 거야.”

 

아직도 외적인 것들을 너무 많이 의식하고 집착하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레지나야.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단다.”

“그래요. 예수님, 당신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어요. 가장 낮은 자까지 다 위로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대로, 하지만 예수님, 저도 가끔은 예수님께서 좀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는 그래도 지붕 있는 집에서 살고 있으니 힘들어도 불평 한마디도 못하잖아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 때문에 제 처지에 대해서 투덜대지도 못하니 약이 오를 때도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할 때가 더 많다는 것 알고 계시지요? 예수님, 정말 고마워요. 위로가 되고말고요. 낮은 곳으로, 연약한 아기가 되어 오신 예수님, 나의 하느님, 고마워요.”